[씨네존/오우삼 특집]'이 장면 때문에 오우삼이다'

  • 입력 2000년 6월 16일 15시 53분


오우삼 영화는 대개 피 튀기는 혈전으로 관객들에게 기억된다. 그 혈전 속에서 몸을 날리는 배우들의 동작은 발레리나 못지 않게 유연하고 곡예사처럼 현란하다. 철저한 계산과 천부적 감각으로 안무하는 그의 액션이 오랫 동안 여운을 남기는 것은 잔혹한 비장미가 흐르기 때문이다.

오우삼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피가 얼마나 차갑고도 뜨거운 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내 영화는 인간적이다"고 선언한 오우삼은 그래서 인간들이 내팽개쳐버린 미덕을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꿋꿋이 재현해 낸다.

싸구려 코미디 영화나 만들던 오우삼을 액션 감독으로 부각시켜준 <영웅본색>(86년)에서 인상적인 것은 단연 주윤발이란 캐릭터다. 검은 트랜칭 코트를 입고는 위조지폐에 담뱃불을 붙여대던 그는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밉지않은 범죄 조직원이다.

의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나이의 세계를 그리는 이 영화에서 주윤발은 허름한 건물 옥상에서 자신을 배신한 후배의 조직원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린치를 당한다. 오우삼은 양분된 화면으로 이 비정한 장면을 효과적으로 연출했다. 푸르름이 감도는 겹겹의 도로와 네온사인으로 불그레한 옥상을 롱쇼트로 동시에 잡은 이 장면은 인간이 얼마나 악랄할 수 있는지를 서늘하게 그려낸다.

쫓는 형사 이수현과 쫓기는 킬러 주윤발의 기묘한 우정을 그린 <첩혈쌍웅>(89년)은 성당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총격전으로 유명한 영화다. 그 총격전에서 주윤발은 두 눈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실수로 눈을 멀게 한 여자 가수의 치료비를 구하려다 자신의 눈과 목숨까지 잃고 마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오우삼은 잔인하게도, 죽어가는 주윤발과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 가수가 사력을 다해 서로를 향해 기어가도록 하면서도 끝내는 만나지 못하게 한다. 어설픈 해피 엔드를 허용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 주윤발은 동료 킬러의 배신을 확인하는 비통함을 놀라울 정도로 호소력 짙은 표정으로 연기했다.

빈민촌에서 야망을 키우며 우정을 다진 청년 3명의 배신과 복수를 다룬 <첩혈가두>(90년)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처절한 비극적 장면으로 기억된다. 우연히 살인을 저지른 뒤 베트남으로 간 이들은 월맹군에 첩자 혐의로 붙잡힌다.

그들 가운데 우정을 세상의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하는 왕조위는 월맹군이 마음 약한 친구에게 다른 포로를 살해하라고 강요하자 친구를 대신해 총을 든다. 털 끝 만큼의 적의도 없이 포로들의 머리 속에 총알을 쑤셔박는 양조위는 형언하기 어려운 고뇌와 불안과 광기를 소름 끼치도록 리얼하게 연기한다.

명장면이긴 하지만 이 대목은 홍콩 느와르에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무리하게 들씌워 전체적으론 공감을 사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영화적 지평을 넓히려던 이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인간을 보는 시선이 지나치게 편향적인 게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냈다.

범죄 조직원으로 위장한 고독한 전직 경찰 양조위와 의협심 강한 터프가이 경찰 주윤발이 무기 밀매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첩혈속집>(92년)은 오우삼의 대책 없는 낭만주의가 고스란히 투영된 영화다. 압권은 병원에서 총질을 해대던 양조위와 터미네이터 같은 범죄 조직의 킬러가 환자들을 사이에 둔 채 대치하는 장면이다.

환자들의 희생을 막자는 무언의 동의 아래 두 사람은 각자 총구의 방향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신사도를 발휘하한다. 유치함도 드러내놓고 보여주면 유치하지 않아 보이는 모양이다. 이 영화의 또다른 명장면은 오프닝이다. 새장에 갇힌 새와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지는 육신을 교차편집한 이 장면은 오우삼 특유의 슬로우 모션과 어우러져 보는 이의 숨통을 조인다.

장클로드 반담을 내세운 헐리우드 데뷔작 <하드 타겟>(93년)으로 고배를 든 오우삼이 헐리우드에서 적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브로큰 애로우>(96년)는 핵폭탄을 빼돌리려는 공군 소령 존 트라볼타와 그것을 제지하려는 대위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홍콩에선 동원할 수 없었던 물량을 업고 만든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물량이 필요치 않았던 오프닝이었다. 검은 바탕의 화면에 가로 세로가 각각 1 cm 정도 되는 흰 정사각형이 점점 커지면서 두 남자가 주먹을 주고받는 화면이 인터컷된다.

그 흰 사각형 속에서 개미처럼 조그만 검은 물체가 움직이는 걸 관객이 간파하고 나면 곧바로 그것이 사각의 링에서 치고 받는 두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모든 다툼은 부질없다고 말하는 듯한 이 장면은 링 안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섀도 복싱 하는 화면을 링의 로프로 사등분한 <분노의 주먹> 오프닝에 버금갈 만큼 신선했다.

헐리우드에서 만든 세 번째 영화 <페이스 오프>(97년)는 오우삼의 진가가 제대로 발휘된 영화였다. 선과 악의 존재를 뒤바꿔 놓고는 인간의 정체성을 되묻는 섬뜩한 장면은 명장면으로 기록되기에 손색이 없다.

미치광이 폭탄 테러범 니콜라스 케이지와 그를 쫓는 FBI 요원 존 트라볼타가 첨단 수술을 받은 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신분이 뒤바뀌는 이 영화에서 오우삼은 두 사람을 거울 방에서 맞닥뜨리게 한다. 대형 거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두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자 원수의 얼굴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첨단의학의 실수가 빚어낸 '운명의 장난'으로 관객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던 오우삼은 <페이스 오프>를 통해 마침내 우둘투둘한 내러티브의 고질을 말끔하게 치유했다.

<김태수(tskim@film2.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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