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린다 김이 노린건 '밀실정책'

  • 입력 2000년 5월 7일 21시 43분


이상하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절절한데, 왜 린다 김은 칙칙할까? 작품 속의 여자와 남자는 몰입하게 만드는데 왜 신문 속의 여자와 남자는 외면하게 만들까? 사랑이라는 건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거라고 옹호해주고 싶은 것이 작품 속에는 있는데 왜 사회면이나 정치면에는 없을까?

▼수백억 예산이 견제 안받다니▼

고백의 진실은 없고, 고백이 폭로가 된 사건은 그 자체로 3류가 된다. 괜히 3류 인생이 되는 것 같아 신문에 난 사생활은 들여다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린다 김과 관련된 스캔들이 실린 면도 그냥 넘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 이게 아니잖아’ 했다.

린다 김 사건의 본질은 칠칠치 못한 고위 인사의 스캔들이 아니라 수백억원의 예산이 쓰레기처럼 버려졌을지도 모르는데 그 상황을 견제할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다. 세금을 자기돈처럼 쓰는 사람들. 아니, 자기돈이면 그렇게 쓰지 못했을 텐데! 우리의 혈세를 공돈처럼 쓰는 사람들을 견제할 장치가 없는 영역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세금 팔아 사랑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진 남자의 도덕성을 의심하기 전에 우리에게 세금이 강간당할 수 있는 구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한다.

로비의 목적은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로비는 허술한 곳을 파고들게 되어 있다. 안보의 이름으로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고 수천억원의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실권자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견제할 수 없는 권력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것이야말로 세금을 강간하고 국민을 모욕하는 구조다.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난 한 사건일까? 아직도 안보와 보안유지의 이름으로 공개되지 않고 있는 많은 예산들이 그렇게 집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빙산의 일각일까? 절대권력이 절대 부패하듯이 비공개에는 늘 비리가 있다. 보안유지라는 명목으로 자신이 임명한 심복들, 혹은 자신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인사들 몇 명만 데리고 하는 관계자 회의에서 국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런 비공개는 안보가 아니라 음모다.

80년대, 군부독재 물러가라고 그렇게 외쳤던 건 군인이 싫다는 뜻이 아니라 밀실에서 결정되는 정책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고 안보의 이름으로 철밥통이었던 음지의 예산이 음험하다는 뜻이었다.

한 예로 안보의 핵이었던 안기부 예산이 국가안보에 쓰여진 경우가 몇 %나 될까? 안기부 예산은 대부분 검은 돈을 합법적으로 만들어준 것이었으며 야당탄압을 하는 데 쓴 예산이었고 부정부패를 도와준 예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의 이름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예산 아니었나!

노태우 정권 때 기종도 나쁘고 비싸기만 한 무기를 구입해 문제됐던 기억이 아직도 총총한데 군부가 아닌 문민정부에서도 그런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지우지 못했다니! 그렇다면 국민의 정부에서는? 모르겠다. 안보의 이름으로 어떠한 견제장치도 없이 관계자들만 모여 국정을 결정하는 회의가 이제는 없는 건지. 국회에서 자료요구를 하면 보안유지 때문에 줄 수 없다고 버티는 그런 음지의 예산집행 과정이 없어지기는 한 건지. 만일 그런 비공개가 남아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런 류의 사건을 불러들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안보사항도 국회엔 공개해야▼

그래서 나는 안보라는 말에 자주 오싹하다. 안보라는 말로 안정감을 준 것이 아니라 귀막고 입막게 했으므로. 그러면 안보를 하지 말라는 뜻인가? 절대로 아니다. 안보라는 말이 말을 배반하지 않게 하려면 제대로 된 비공개가 필요하다. 진짜 안보 때문에 진짜로 비공개해야 하는 예산이라면 미국처럼, 국민에는 비공개해도 그 비공개의 내용을 견제할 수 있는 의회에는 공개해야 한다. 왜 그런 예산이 필요한지, 그런 예산집행 과정이 왜 합리적인 것인지, 심복들이 아닌 야당 앞에서도 설득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보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음모와 독재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야 국민의 정부에 국민이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주 향(수원대 교수·철학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