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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4월 5일 20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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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했으나 여전히 정치를 움직이는 많은 우리의 대표는 권위주의 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다. ‘정치인 교체없는 정권교체’가 우리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정치인들은 일종의 ‘엘리트 카르텔’을 형성해 신진 정치인들의 진입을 가로막은 채, 해묵은 지역주의를 부채질하고 시대착오적 색깔론으로 유권자를 자극해 표를 달라고 우격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대표가 되기 위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공적 시민으로서의 의무인 납세, 병역도 다하지 않은 채 뻔뻔스럽게 시민의 대표가 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보스중심의 독과점 체제를 보장하고 있는 한국의 정당지배구조는 유권자의 선호와는 상관없이 그들에게 계속 공천을 주어 유권자에게 원하지 않는 선택지를 강요하고 있다.
시민운동단체들은 바로 오만하고 무책임하며,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도 다하지 못한 정치인들을 정치권에서 퇴출시켜 민주주의 나라에서 주인이 누구인가를 똑똑히 확인시켜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정치사회의 실패에 대한 시민사회의 책임추궁의 성격이 있다.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돼야 한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에서 사회운동단체들이 권위주의 정권의 퇴장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낙천 낙선운동은 정당 정치사회 정치인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적 대표체계의 민주적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낙천 낙선운동에서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났던 전통적인 국가 대 시민사회의 대립구도가 발견되지 않고 정당 대 시민사회의 갈등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표의 실패’에 대해 주인인 시민이 직접 제도권 밖에서 책임추궁을 할 수 있게 하는 법적인 장치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아 이번 시민운동단체의 낙선 캠페인은 현존 선거법 법규정과 충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에 대해 시민운동단체들은 소로, 간디, 마틴 루터 킹이 전개했던 시민불복종으로 직접적인 거리에서의 낙선운동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고, 낙선대상이 된 정치인들은 시민운동단체들이 바로 그들이 보호하려하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의 대표들은 법치주의를 들어 시민운동단체의 낙선운동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직무유기로 시민사회의 직접적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법체계의 도입이 지연, 저지돼왔기 때문이다. 시민운동단체의 낙선운동은 국민주권을 보장하는 헌법 정신과 규범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대표들이 최소한의 공공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은 대표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가장 초보적인 시민권 행사인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시민사회의 낙선운동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난 참여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제 민주주의를 개선, 보완해 더 완전하게 하려는 참여 민주주의적인 시민운동인 것이다.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이 성공할 때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총선이후 시민운동단체들은 공천과정에 개입해 정당으로 하여금 더 이상 무능 부패 반인권 부적격의 후보 중에서 선택을 강요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하는 ‘낙천운동’과 선거과정 자체에 개입하여 비민주적인 후보를 낙선시키려는 ‘낙선운동’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선거 후에도 대표에 대한 항시적 감시를 통해 우리 대표들이 투명성 책임성 응답성을 제고하도록 부단히 압력을 가해야 한다.
임 혁 백(고려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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