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Special]'보이지않는 빈곤층' 늘어난다

  • 입력 2000년 3월 22일 10시 46분


이론적으로는, 한 나라의 국민이 더 부유해질수록 소외된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기가 더 쉽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이 더 부유해질수록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더 멀어지고 따라서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흥분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바로 이런 현상이 지금 미국의 정치와 문화에 전례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이 지금처럼 호황을 누렸던 1960년대 초에는 진짜 번영이 도래하기도 전에 부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복지 프로그램, 사회 연금제도, 노인 의료보험제도 등이 확대되었다.

많은 미국인이 거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던 100년 전에도 부의 분배에 대한 투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노동조합들은 경영자들과 투쟁을 벌였고, 공공교육은 신속하게 성장했으며, 독점 금지법 및 최저임금과 최소 노동시간에 대한 법 등이 제정되었다. 그 전에도 미국인들은 부를 축적할 때마다 빈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 논의가 없는가? 8년 전, 빌 클린턴이 처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다우존스지수는 3,500을 밑돌고 있었고, 연방정부의 적자는 수천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궁핍했던 그때 클린턴은 “단 한 사람도 뒤에 처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지금은 빈곤에 대한 논의가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지난해 여름에 클린턴이 사우스다코타의 인디언 지역에서부터 세인트루이스의 빈민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지역을 순례했을 때, 정부는 이 여행을 빈민가 순례가 아니라 ‘새로운 시장 개척’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유례가 없는 경기호황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번영을 누리고 있는 미국과 거기에서 소외된 사람들 사이를 사회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번영을 누리고 있는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대적이지도 않고, 가끔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났을 때는 매우 관대한 조치를 취하곤 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마치 먼 나라의 외국인들처럼 생각된다. 그들은 어딘가 먼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들이 안됐다고 생각할 뿐이다.

얼마 전 나는 몇 달 동안 커다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 낮 동안 나는 나보다 더 젊고 나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과 어울렸다. 나는 그들을 모두 좋아했지만, 곧 경제적인 면에서 그들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으로서 주위를 보는 법을 배웠다. 비록 지금 나는 맨 처음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 기대했던 것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지만, 나보다 더 부유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나 자신이 간디처럼 물질주의를 배척하고 있는 것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한 예로 젊은이들이 모두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오후 9시쯤이 되면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청소 용역회사의 제복을 입은 60대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발이 아픈 사람처럼 약간 절룩거리면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청소를 했다. 그리고 내게 뭐라고 말을 걸곤 했는데 나는 그녀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녀는 내게 외국인이나 다름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복도 아래쪽에서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서둘러 사무실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이나 나이 많고 기술이 없는 이민자들의 고생에 대한 기사는 기꺼이 읽을 수 있어도, 그녀가 절룩이며 걷는 것은 정말이지 보고싶지 않았다.

요즘은 컴퓨터나 인터넷 관련 창업회사의 성공으로 순식간에 수백만 달러, 수십억 달러를 손에 쥐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한 인터넷 회사의 창업자는 재산이 3억 달러가 될 때까지는 돈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3억 달러가 넘으면, 돈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척도가 되기 시작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돈이 사회적 표시가 되고, 남들과의 비교가 항상 저 위쪽만을 향하고 있는 세상에서 1주일 동안의 수입이 246달러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은 제쳐두더라도, 1만 달러가 없어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옛날의 재계 거물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앤드루 카네기와 J P 모건은 주급 1달러 인상을 놓고 파업도 불사하는 노동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기술 경제에서는 이런 연결고리가 느슨하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해서 마이크로소프트에 1억 달러 이상을 받고 팔아 넘긴 찰스 퍼거슨은 “자동차 제조업체라면 비교적 교육수준이 낮은 블루 칼라 노동자들을 반드시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인터넷 기업은 그런 일에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 인터넷 오디오 회사인 리얼네트워크의 창업자인 롭 글레이저는 “인터넷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강도가 세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누에고치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즉, 일에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가족과 친구를 위한 시간을 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밖의 세상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빈곤을 도외시하는 추세가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칼럼니스트인 아리아나 허핑턴은 “레이건 행정부 시대에는 적어도 빈곤 문제를 지적하는 야당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민주당이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좌파에 속하는 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이밖에, 세계 경제 속에서 국가의 개념이 약해졌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와 동료 시민들에 대한 책임의식도 덩달아 엷어진 것이 빈곤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빈곤을 도외시하는 추세의 이유는 아주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빈곤이 우리 옆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먼 나라 일로 인식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그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청소를 하던 그 아주머니의 이름을 끝까지 알지 못했다. 내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home/20000319mag-poverty.html)

<제임스팰로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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