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빈 손'의 위력

  • 입력 2000년 3월 13일 19시 25분


지역당 말고 그야말로 전국정당이 나올 수는 없을까.‘3김씨 말고 가령 김수환추기경이나 법정(法頂)스님이 팔도강산의 후보 손을 들어주면 나오기라도 할까?’ 한 총선 후보로부터 들은 대답이다. 물론 가상이요 우스갯소리지만, 그렇다면 그런 분들의 지역주의를 이기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빈 손’이기 때문이다. 제 권력, 제 이권, 제 재산, 제 동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무력(無力)’한 분들이기에, 그들의 말이 울림을 얻는 것이리라.

존 메이저 전영국총리가 56세의 나이로 정계은퇴를 밝혔다.‘가야 할 시간을 넘겨 머물기보다, 머물도록 요청받는 동안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영국식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봄 냇가의 물소리처럼 청랑하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계속 정상을 지켜달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내려서서 길이 역사에 남았다. 세상이 이들을 주목하고 아름답게 기억하는 이유가 다 하나로 통하는 것 아닐까. 죽을 때까지 쥐고 싶은 것을 버리고 떨치는 용기와 결단으로, 스스로 유혹을 죽이고 빈손이 되기 때문 아닐까.

김영삼 전대통령의 상도동 집에 ‘총선 빈객’이 잇따르고 있다. 민국당의 김윤환 이기택 장기표씨 등에 이어 어제는 김상현의원이 찾아가 머리숙여 도움을 청했다. 총선 대목을 맞아 즐겁기만 한 YS는 그가 자주 말했던 ‘천추의 한’을 진짜로 남기려 하고 있다. 그가 과거 말했던 ‘한’은 92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5년의 한’으로 풀렸다. DJ가 87년에 그와 함께 대선에 나섰기 때문에 대권 꿈이 날아갔다고 불평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총선 배후조종은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정치사에 ‘천추의 한’으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그가 야당총재 시절 가장 비판했던 대상이 바로 야당을 분열시킨 인사들이었다. 이제 그가 참으로 범죄시하던 야당 분열에 스스로 앞장서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민국당 요인들의 등을 두드려 가며 지역색의 표를 보태려 한다. 그의 출신지역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선명무쌍한 지역당이 자리잡기를 기대하고 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연희동 집에도 ‘총선 손님’들의 방문 신청이 쌓여 있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모처럼 총선 대목을 맞아 정계요인들과 골프 초대를 받아가며 전직 대통령의 보람을 만끽하고 있다.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씨의 처신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런 ‘전직’의 ‘총선 즐기기’가 본격적인 정치개입으로 발전하면 필시 재앙이 오고 말 것이다. 너도나도 퇴임후의 ‘이삭 줍기’같은 권력욕의 노추(老醜) 경쟁을 벌일 경우를 생각만 해도 아뜩하다. YS가 ‘전직대통령도 국가의 장래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데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대통령까지 다 지내신 분들이 염치없이 다시 나서기냐고는 하지 않겠다. 신진기예들의 능력이나 비전이 검증되지도 않은 터에 무조건 그들을 믿고 떠나시라는 얘기도 아니다. 그리고 YS에게 굳이 재임중의 실수와 실패로 나라를 거덜내고 국민을 전란에 버금가는 IMF도탄(塗炭)에 빠뜨렸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지도 않다. 전씨에게 12·12쿠데타나 광주학살 같은 과오를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노씨에게 수천억 비자금 갈취같은 죄업을 되풀이할 것까지도 없다.

이제 국민은 그들이 저지르고 흐트러놓은 지긋지긋한 과오로부터, 그 피해와 소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한다. 세계는 급변하고 나라의 갈 길은 바쁘다. 그런데 ‘전직’들이 다시 정권 야권을 비집고 횡행하거나 훈수 꼼수로 재임중의 오류 변명에 나서면 필시 전직들의 ‘과거’가 논란이 되고 말 것이다. IMF사태초래 쿠데타 수천억비자금같은 과거사가 정쟁의 초점이 되고 정치는 거꾸로 흘러가게 된다. 미래로 세계로 나아가기는커녕 악몽같은 과거사로 날이 가고 해가 갈 것이다.

전직 대통령들은 유혹과 부추김에 초연해야 한다. 뿌리치고 흔쾌히 버려야만 그나마 잃어버린 존경과 깎인 이름을 회복하는 길이다. 영향력을 행사하고 추하게 잔명을 보전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면 그야말로 필생즉사(必生則死)로 가는 길일 뿐이다. 쥐려고 하다 잃어버릴 것이 아니라, 놓아 버리고 빈손의 위력으로 울림과 영생을 얻는 필사즉생(必死則生)으로 가야 한다. 김충식 <논설위원> 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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