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 선거바람]연극같은 정치판 신랄한 풍자

“금권정치 계보정치 사랑방정치 지연 혈연 학연, 이런 것에 농락당하지 마십시오. 바로 듣고, 바로 보고, 바로 찍으십시오. 여러 분의 귀중한 한 표가, 여러분의 양심적인 한 표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극단 아리랑의 연극 ‘기호0번 대한민국 김철식’(방은미 연출)이 공연되는 서울 동숭동 아리랑 소극장. 정당의 파벌싸움이 싫어 평생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옴약장수로 선거 공탁금 50만환을 마련하는 ‘한 마리 외로운 늑대’ 김철식이 제4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해 선거유세를 하는 장면에서 객석에서는 “옳소”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4·13총선을 앞두고 서울 동숭동 대학로 연극계에도 ‘선거바람’이 불고 있다. 선거 무렵에 터져나온 판문점 총격사건 등을 소재로 ‘색깔론’을 풍자하는 연극 ‘돼지비계’(연출 박근형), 어른들의 정치판에 염증을 느낀 중 고교생들이 사이버당을 결성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모스키토’(연출 김민기) 등 총선을 소재로 한 연극이 잇달아 공연되고 있는 것. 이들 연극은 내용에 비춰 ‘바꿔 열풍’과 맥을 같이 한다.

▼정치와 연극▼

외국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탈리아의 다리오 포 등 정치를 소재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많지만, 국내에서는 1980년대 시위집회에서의 ‘마당극’ 외에는 본격적인 ‘정치 연극’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정치 9단’들이 펼치는 오염된 ‘정치의 예술’에 맞서, 연극인들이 ‘예술의 정치’로 유권자 혁명의 불길을 지피겠다고 나선 것이다. ‘돼지비계’의 연출가 박근형은 “정치가 때로는 연극보다 더 ‘극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평화의 댐’ ‘6·29선언’ ‘판문점 총격사건’ 등은 선거를 앞두고 벌어졌던 대표적인 정치 연극이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바꿔 바꿔▼

“4·13총선 때 투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 생각을 바꾸게 됐다.”(양지은·24) “지금도 어딘가에 대한민국 김철식 같은 인물이 있을 텐테 그런 사람에게 한 표를 던지겠다.”(추성수·20) ‘기호0번 대한민국 김철식’을 보고 나온 관객들은 연극을 본 뒤 이같이 ‘바꿔’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었다.

극단 학전의 록뮤지컬 ‘모스키토’는 한 술 더 떠 청소년들이 정당을 결성해 정치에 참여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펼친다. PC게임방과 인터넷방송국을 통해 전국적 힘을 얻은 청소년들의 ‘모스키토 당’은 부패한 어른들의 정치행태에 모기처럼 따끔하게 ‘침을 놓자’는 정당. 연출자 김민기는 “각 당의 이합집산, 지역감정 조장, 유권자 운동 등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 현실을 담기 위해 매일 신문을 보면서 대본을 수정하고 있다”며 “인터넷 ‘모스키토’ 홈페이지(www.hakchon.co.kr)도 개설해 청소년들의 연극 참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한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상연중인 정치연극◇

▽모스키토〓극단 학전. 독일 원작 ‘모기들 납신다’(Moskitos Sind Da)를 번안한 록 뮤지컬 . 여야 정치권이 유권자 수대로 주어지는 정치보조금을 늘리기 위해 중학생 이상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주면서 청소년들이 ‘모스키토 당’을 결성한다는 내용. 4월15일∼8월15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학전블루 소극장. 월∼금 6시, 토일 4시 7시. 02-763-8233

▽돼지비계〓희곡작가 오태영의 ‘통일연극시리즈’ 두 번째 작품. ‘공천 부적격자’로 판정난 깡패출신의 국회의원이 선거를 앞두고 안보위협을 조장하려는 시도를 희극적으로 그렸다. 15일∼5월14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극장. 화∼금 7시반, 토일 4시반 7시반. 02-764-6052

▽기호0번 대한민국 김철식〓힙합댄스를 추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려는 혜리에게 아버지가 해방정국에서 활동했던 삼촌의 일기장을 보여준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정치인 김철식의 삶은 엉뚱하고 무모하지만, 병든 정치현실에 대해 통쾌한 풍자를 날린다. 4월30일까지 서울 동숭동 소극장 아리랑. 화수목 7시반, 금 4시반 7시반, 토일 3시 6시. 02-741-5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