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되돌아본 뉴욕100년/1920년대

  • 입력 2000년 3월 7일 20시 06분


뉴욕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미국의 문화수도로서 자리를 굳힌 것은 1918년 11월부터 10년 동안의 기간이었다.

1920년대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모든 것이 떠들썩하던 시절이었고, 금주법이 도입되면서 밀주와 갱들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젊은이들의 시대였다.

▼ 戰後 젊은이들 자유 만끽 ▼

워런 하딩 대통령은 이 시기를 가리켜 “정상적인 것으로의 회귀”라고 불렀으며, 작가인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화려한 잔치”라고 불렀다.

1922년 무렵 이 화려한 시기는 벌써 재즈의 시대로 불리고 있었다. 분명히 재즈는 뉴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지만, 뉴욕 시의 팝 음악 관계자들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틴 팬 앨리가 대중음악의 레코딩과 배급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뉴욕은 미국 음악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뉴욕의 문화적 붐을 이끌어가고 있던 것은 틴 팬 앨리뿐만이 아니었다. 뉴욕의 오페라와 오케스트라는 물론 박물관 미술관 경매장 놀이시설도 다른 도시보다 훨씬 더 뛰어났으며, 브로드웨이는 이미 미국을 대표하는 극장거리가 되어 있었다. 뉴욕은 또한 미국에서 가장 많은 출판사와 잡지사들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했다.

흑인들의 거리인 할렘도 ‘할렘 르네상스’ 시대를 만끽하고 있었다. 특히 음악적인 면에서 흑인들의 민속예술이 세련된 예술로 변신함에 따라 할렘에서는 문화의 꽃이 활짝 피었다. 루이 암스트롱과 듀크 엘링턴이 이끄는 음악가들은 순식간에 전설이 되어버린 할렘의 클럽들에서 연주를 하며 부디 볼덴, 스코트 조플린, W C 핸디 등이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이룩해놓은 음악적 혁신을 보편적인 언어로 확대시키고 있었다.

이들이 연주하는 재즈 음악은 미국의 대중음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또한 조지 거슈윈, 해롤드 앨런, 버논 듀크, 콜 포터 등 한 세대의 작곡가들이 이들의 재즈에 귀를 기울였다.

▼ 흑인재즈 대중음악 혁신 ▼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처음으로 연주를 했던 해인 1927년에 양키스 팀의 베이브 루스는 60번째 홈런을 날렸으며, 뮤지컬‘쇼보트’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고, 대서양 횡단 단독비행에 성공해서 시대의 우상이 된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던 날 뉴욕 시민들은 색종이를 눈보라처럼 흩날리며 그를 환영했다. 할렘에서는 린디 호프라는 춤을 만드는 것으로 그에 대한 환영의 뜻을 표현했다. 그런데 이 린디 호프는 1920년대뿐만이 아니라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 화려했던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이 춤은 사람들이 웃을 일이 별로 없었던 대공황기간에 화려함을 표현하는 방법이 되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의 에너지와 임기응변 능력의 상징이 되었다.

(http://www.nytimes.com/specials/nyc100/nyc100-3-murr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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