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새천년]'팍스 아메리카나' 계속될까?

  • 입력 2000년 2월 10일 10시 41분


《21세기 진입을 며칠 앞둔 지난해 연말,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는 홍콩에서 출발한 화물선의 컨테이너에서 중국인 시체 2구가 발견됐다. 함께 밀입국을 시도하던 중국인 15명도 체포됐다. 이들이 체포돼 머리에 두 손을 올리고 있는 광경이 TV를 통해 방송됐다. 미국 방송들은 급증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밀입국을 단속하기 위해 해안경비가 강화됐다고 보도했다. 중국인들은 미국행 경비로 5000달러를 들였지만 죽음과 추방의 허망한 종말을 맞았다. 중국인만이 아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인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주 남부 사막에서는 매년 100명 안팎의 중남미인 시체가 발견된다. 이들은 ‘코요테’라고 불리는 안내인을 따라 국경지대 사막을 넘다가 탈수증으로 숨진 사람들이다. 밀입국 루트를 잘 아는 코요테들은 안내료 1000달러만 챙기고 밀입국자들을 사막에 버려둔 채 도망가기 일쑤다. 이뿐만 아니라 찜통같은 기차 화물칸에 숨어타고 밀입국하다 열에 떠 죽은 시체도 종종 발견된다. 기회의 땅 미국이 만들어내는 비극, 이것처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실상을 말해주는 좋은 사례도 없다.》

독일의 작가 요셉 요페는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공해를 건너 미국으로 들어가려 하지, 중국으로 그렇게 가려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일각에서 21세기에 미국의 지위를 넘볼 잠재적 강대국으로 중국을 꼽지만 당치 않다는 얘기다.

역사상의 어떤 세계 제국도 사람들이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국가는 없었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도, 대로마제국도, 칭기즈칸의 몽고도 그렇지 않았다. 창이나 총칼로 사람들을 끌고는 갔어도 들어오는 사람을 총칼로 막았던 제국은 일찍이 없었다고 역사학자 내이던 로젠버그는 지적했다.

미국의 힘은 미는(pu-sh) 데 있지 않고 끌어당기는(pull) 데 있다. 거대한 자석과 같다. 저임의 노동자와 싼 공산품은 물론 각국의 두뇌들도 끌어들인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공계통의 외국 고급두뇌들은 심지어 영국처럼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까지 미국에 절반 이상(51.3%) 잔류한다. 미국의 잡아당기는 힘이 그들을 떠나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미국에 남을수록 미국의 끌어당기는 힘은 더욱 강해진다. 자석의 이치가 그렇다. 미국의 지적 헤게모니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핵심인 것이다.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의 조지프 나이 원장은 미국의 힘을 ‘소프트 파워(Soft Power)’라고 규정했다. 군사력이나 경제제재로 행사되는 하드파워(Hard P-ower)와 달리 미국적 가치와 삶의 질, 그리고 자유시장경제의 흡인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능력이다. 예컨대 경제제재 완화로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발사실험 중지 약속을 얻어내는 것이 바로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그러나 소프트파워에는 한계가 있다. 코소보 주민에 대한 인종청소를 막기 위해 도덕적 군사개입은 할 수 있어도 인종청소를 지시한 유고연방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몰아내는 데까지 개입을 확대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이의 개발 의혹이 있는 이라크의 시설들을 폭격할 수는 있어도 이를 지시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몰아낼 수는 없다. 그나마 지금까지의 개입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엔이라는 집단안보체제 내부의 의사결정 절차를 밟아 이뤄졌다.

물론 이것은 미국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다. 미국은 제도화되고 절제된 헤게모니를 추구한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미국의 투표권은 15%밖에 안된다. 하지만 IMF의 규약에 85%이상 동의해야 하는 규정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유일하게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물론 이 비토권을 거의 행사하지 않는다. 비토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암시만으로 방향을 결정해나간다.

그러나 미국이 국제적 결의의 형태로 개입을 결정하는 한 다른 국가들의 합종연횡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이라는 일극(一極)과 유럽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 등의 다극(多極)이 병존하는 유니-멀티(Uni-Multi)체제로 21세기 구도를 그린다. 이에 대해 스탠리 호프먼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불만섞인 표정으로, 프란시스 후쿠야마 조지 메이슨대 교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로 21세기 초강대국은 미국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헌팅턴 교수의 병존체제에서도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인 만큼 양쪽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는 달러화가 말해준다. 미국은 세계경제 총생산의 27%를 차지하고 있지만 무역거래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이상이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통화의 57%가 달러화다.

미국은 매달 무역적자가 천문학적인 액수로 늘어나고 있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언제든 자국 중앙은행이 찍어낼 수 있는 달러화로 수입대금을 결제하기 때문에 차입비용이 들지 않는다. 태국이나 한국과 같은 외환위기가 발생할래야 할 수 없다. 대미 수출국들은 미 재무부가 발행한 채권을 매입하고 있기 때문에 달러화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지난해 출범한 유로화도 이런 달러화의 독점적 위치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세계의 기축통화가 달러화와 유로화로 양분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달러화의 위치를 대체할 정도까지 유로화가 성장하기는 어렵다. 유로화에 참여한 11개국은 미국 국내총생산의 77%밖에 안된다. 이러니 미국 내에서 21세기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난해 9월 월스트리트저널(WSJ)과 NBC방송의 공동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중 7명이 다음 100년 동안에도 미국은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66%는 훨씬 살기 좋아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지나친 낙관론은 자기오만과 주위에 대한 책임방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미 상원이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비준을 거부, 스스로 대량살상무기 확산저지라는 명분을 저버린 것은 불길한 전조였다.

이것은 WSJ가 올해 1월1일자 밀레니엄 특집판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할지 모른다는 시나리오의 이유로 예시한 것중 하나였다. 자족감에 빠져 바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세계 전역에 연쇄적인 군비증강경쟁을 부추겨 미국이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WSJ는 이 특집에서 전세계 중산층이 미국화(Americanize)되는 것을 첫째 시나리오로 제시했다. 주권국가의 틀은 여전히 유지되지만 각국의 중산층들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고 미국에서 나온 미디어와 상품, 서비스를 소비하는 세상이 온다는 것.

둘째 시나리오는 아예 세계 자체가 미국화된다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 기업들 간에 자발적 인수합병이 이뤄지듯 각국이 통화를 달러화로 단일화하는 경제적 동맹을 거쳐 아예 주권을 포기하고 미국의 한 주로 복속되길 희망하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칠레같은 나라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외연을 넓히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 시민들이 거부권을 행사할 거라고 이 신문은 그렸다.

한국인이라면 ‘착각도 자유’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은 오만한 상상이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미국이 영어와 네트워크를 무기로 세계 전체를 더욱 강력하게 흡인하는 추세가 21세기 상당기간 지속될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키워드/'소프트 파워' ▼

미국에서 공부하는 50만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은 대부분 본국에 있을 때보다 미국에 대해 훨씬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 경우 유학생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소프트 파워이고 유학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미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거나 활동하는 것도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이룬다.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영어를 배우다 보면 미국 문화에 더욱 빠져들게 된다. 이 역시 소프트 파워다.

미국 단독으로 타국에 무력개입이나 경제개입을 하면 하드파워(Hard Power)의 행사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기구를 통해서 그렇게 하면 소프트 파워로 성격이 바뀐다. 미국의 일방적인 ‘제국주의적’ 결정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보조를 맞춘 절제된 개입이기 때문이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원장이 자주 쓰는 이 개념은 미국을 전통적인 세계제국과 구별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미국이 소프트 파워와 하드 파워를 적절히 섞어 써야 최상의 효과가 나올 수 있다고 나이 원장은 주장한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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