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16)

  • 입력 2000년 1월 5일 18시 32분


동쪽에서 나온 사람들은 마치 장터의 약장수 앞에 모여선 군중처럼 그 진열창 앞에 입을 꾹 다물고 팔장도 끼고 아이의 손목도 잡고 한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지요. 이 선생 말대로 꼭 필요하지는 않은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낼수록 복지는 사라진다는데. 그가 이빨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옛날 사람들이 살아 돌아온다면 치과 의사의 정교한 기술에 놀랄까, 아니면 우리의 나빠진 치아를 보고 놀랄까요. 건강한 이빨을 갖는 생활을 유지한다는 해결 가능한 방도를 찾는 대신에 더욱 더 이빨이 나빠져 가는 것과 치과 기술이 더욱 더 향상하는 것이 서로 끝없이 상승하고 있다는 얘기. 그래서 전에는 전혀 존재할 필요가 없던 치과의사의 존재를 매우 고맙게 여기는 이유가 생겨난대요. 여자의 속옷 상점, 갖가지 이름의 부띠끄, 악세사리와 신변잡화들, 화장품, 전자제품의 창에서는 다시 그 속의 텔레비전 화면 안에서 새로운 물건들이 재생산 되고 있었어요. 처음에 이들은 좀 수줍어 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상품들을 미술품이나 경치처럼 감상하기만 했죠. 나중에 서독 정부는 서베를린 시내로 나오는 동독 사람 모두에게 신분증만 내보이면 아무 은행에서나 백 마르크씩 그냥 주기로 결정했어요. 한 사람 앞에 백 마르크씩이요. 그래서 동독 사람들은 가족과 친지를 모두 동원해서 끝없이 서쪽을 향해서 몰려들었어요. 다섯 사람의 가족이면 오백 마르크이고 이만한 돈이면 서독에서도 호화판 쇼핑을 할 수가 있었거든요. 며칠 안가서 베를린 중심가는 거대한 시장으로 변했습니다. 동독의 먼 지방에서까지 사람들이 베를린으로 몰려 나왔지요. 그들이 제일 먼저 사들이기 시작한 것은 전자제품이었어요. 저마다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카세트 라디오였지요. 어서 빨리 서방을 공부하려면 텔레비전이 새로운 학교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다음에 사들이기 시작한 것은 과일이었죠. 사회주의 계획경제 아래에선 외국에서 과일을 수입하지는 않으니까 일년에 잠깐씩 딸기와 사과 이외엔 없대요. 그들이 가장 많이 사간 것은 캘리포니아 산 델몬트 도장이 찍힌 오렌지였어요. 그리고는 휴지도 몇 상자씩 샀어요. 훨씬 나중에 중고차가 동독 사람들에 의해서 거덜이 났지만요. 그런데 우습죠. 서독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외국인 유학생 족속들은 반대로 동독쪽 슈퍼마케트로 몰려가서 고기며 빵이며 낙농품이며 하는 먹을 것들을 싹쓸이를 해왔으니까요. 거기선 식품 값이 서독의 삼분지 일 값 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책들은 왜 그렇게 쌌는지. 이런 기묘한 역할 바꾸기는 패스포트를 내보이지 않고 아무런 절차 없이 왕래하게 될 때까지 두어 달 동안이나 지속되었어요. 경제 통합을 위해서 서독 정부는 신고된 액수에 한한다는 조건 아래 동독 화폐를 일대 일로 교환해 주기로 결정했고 자연스레 암거래가 활성화 되었어요. 동남아 사람들이나 터키인들은 동베를린 구역으로 넘어가서 동독인들의 신고되지 않은 화폐를 싼값에 사다가 서독 화폐로 바꾸곤 했지요. 그런 일은 모두 몇 달 뒤의 일이고 드디어는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다음 해에 서독은 동독을 흡수해 버리게 되지요.

나는 송영태를 이희수씨네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어요. 밖에서 그이에게 전화를 하고 대충 설명을 했지요. 이 선생은 흔쾌히 손님을 맞이하겠다며 그를 데려오라고 했지요.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