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임상원/언론장악 문건과 정치현실

  • 입력 1999년 10월 28일 20시 11분


불행하게도 현대사에서 우리 언론은 항상 음모와 공작의 대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우리 언론과 언론인이 음모의 주체로까지 떠오르고 있다.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이 국회에서 정부의 ‘언론장악’ 문건이란 것을 공개한 사건이 반전하면서 이 문건의 작성자가 중앙일보의 문일현기자로 확인됐다. 문기자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런 문건을 작성했는지, 또 누가 이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개인적 소신이라니…▼

국민회의 말이 맞는지, 정형근의원 말이 맞는지, 이종찬부총재 말이 맞는지, 아니면 중앙일보의 말이 맞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진실이 어떤 것으로 판명되든 이 사건은 우리의 언론과 정치에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다. 아니 깊은 상처를 이미 남겼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참으로 부끄러운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언론과 정치의 자화상을 보고 있다. 기자가 정권에 언론장악 방법을 구체적으로 적은 문건을 작성해 전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개인자격으로 언론개혁을 위해 개인적인 소신을 적은 것뿐이라는 당사자의 이야기는 듣는 이를 경악하게 만든다. 언론인은 고사하고 한 지성인으로서 그 도덕적 몰염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한 언론인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요인이 깊이 개재돼 있다. 이런 언론인이 존재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문화, 그리고 그런 언론인을 길러낸 언론기관의 문화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건은 우리 언론과 정치권력의 관계가 얼마나 왜곡돼 있는가를 웅변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에 언론만의 책임을 따질 일은 아니다. 정치권력의 책임이 보다 근원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력은 항상 음모론적 방식으로 언론을 다루었다. 언론을 음모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정치권력은 언론을 협박 회유 야합하고 내 편을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했다. 그 결과의 하나가 이번 사건이다. 정치권력은 언론을 음모의 대상으로 삼아 그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언론을 출세의 길로 만들고 그리하여 일군의 언론인들은 언론의 노하우를 갖고 정관계로 들어가 거꾸로 언론의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곤 한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자신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으로 친숙함을 통한 도움, 혹은 협조를 얻어낸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개인적으로 친숙한 관계를 통한 협조요청도 강제이고 억압이다. 이들은 분명히 언론자유의 원리에 반하는 행위이다. 언론의 언론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다.

▼권언유착 단결돼야▼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언론과 정치권력의 관계가 얼마나 왜곡되고 비정상적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말해준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언론과 정치권력의 관계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다.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이 언론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언론대로 몫이 있고 정치권력은 정치권력대로 몫이 있다. 그들은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장에서 게임의 룰에 따라 서로 다투어야 한다.

언론과 정치권력간의 왜곡된 관계, 또 정치권력의 언론에 대한 음모론적 접근자세는 지양돼야 한다. 이를 위해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이번 사건의 전체적인 실체를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조속히 밝히는 것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정형근의원이 폭로한 문건의 내용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낯설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부는 되씹어 보아야 한다.

이 문제는 옷로비 사건이나 조폐공사 사건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중대한 문제이다. 언론의 자율성은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런 언론을 장악하려는, 혹은 공작하려는 음모가 있다면, 혹은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목적을 위해 이 문건이 조작되고 이용됐다면 그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모두 밝혀야 한다. 그리고 관련자들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진실규명은 정부 국회, 그리고 관련된 중앙일보는 물론 우리 언론기관 모두의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이다. 천박스럽지 않은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정치, 그리고 언론을 우리는 바란다.

임상원<고려대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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