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57)

  • 입력 1999년 10월 28일 20시 11분


여기다 세워.

주임이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병원 앞엔 주차장도 없단 말야. 거긴 더 복잡해.

여기선 멀지 않아요?

하는 교사의 물음에 주임이 먼저 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괜찮아, 백 미터두 안돼.

옆에 앉았던 교사가 내 등뒤의 포승줄을 한쪽 손에 몇번이고 감아서 움켜쥐고 내 등을 밀어냈다.

내려.

두 팔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앞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지프에서 내렸고 차 문 옆에 섰던 주임이 내 상반신을 받쳐 주었다. 길에 내려서자 주임이 내 옆에 바짝 붙어서고 교사는 줄을 잡고 내 뒤에서 따라왔다. 나는 길 건너편의 가게며 음식점을 둘러보았다. 저쪽에 넓은 유리문이 달린 병원의 정문이 보였다. 부근의 금은방에선가 부인이 어린이의 손목을 잡고 나왔다. 아이는 칭얼대며 따라왔는데 두 사람은 우리 일행과 보도 가운데서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어 있었다. 아이의 찡그린 얼굴은 나를 보자마자 멍한 표정으로 변했다. 부인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발 뒤꿈치에서는 뒤축을 잘라낸 고무신 바닥이 철떡이며 부딛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신발이 미끄러져 벗겨지지 않도록 보폭을 좁혀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가 제 엄마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저 사람 누구야?

여자는 대답없이 아이의 손을 한번 잡아채고는 걸음을 빨리해서 우리 곁을 지나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그들 모자는 가다 말고 아예 그 자리에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웃어 보였더니 여자가 다시 아이의 손목을 잡아채고 바삐 걸어갔다.

병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 대기실에는 디귿자로 배치된 소파가 있었고 접수 창구를 향하여 일렬로 놓인 의자들이 보였다. 주임이 지정된 의사를 만나러 가고 나는 교사의 계호에 따라 안쪽의 소파로 가서 앉았다. 의자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기묘한 것은 그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민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거의가 나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고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교사가 앉은 디귿자 형의 소파에 앉은 사람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듬성듬성 빈 자리가 있었지만 그쪽은 계속 비어 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사람은 십대의 두 여학생이다. 그들이 정문으로 들어올 때부터 뭔가 재깔대고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섰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제 이야기에 팔려서 그냥 접수실 앞을 돌아서 소파를 향하여 걸어왔다. 우리 앞의 네댓 발짝 앞에 와서야 그네들이 멈춰 섰다. 그리고는 표정과 고갯짓으로 주고받았다. 어머, 저거 뭐지? 얘 딴데루 가자.

마음 속으로 몇번이나 중얼거린다. 나는 비도덕적인 국가권력에 대들었을 뿐 죄인이 아니다. 나는 쫓겨난 자가 아니다. 거부하고 스스로 나온 자다. 그러나 그것은 중얼거림일 뿐, 무심한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서 스스로 객체가 되고 만다.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갈아입은 호송복에는 아무런 표지도 붙어 있지 않아서 천사백 사십사번으로마저도 나는 인식되지 않는다. 나를 인식해줄 대상에 의해서 부정된 나는 여기에 없다. 그야말로 말살되었다. 세속의 길은 이제 내 등뒤에서 끊기고 닫혔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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