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52)

  • 입력 1999년 10월 22일 19시 15분


그 무렵에 정치범에게도 시작되었던 사회 참관과 귀휴는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짜 좌익수들에게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았고 가족이 있고 전향할 의사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골라서 하나 둘씩 개인적으로 집에 보냈다. 그들은 사복한 호송 교도관과 함께 기차나 버스를 타고 먼 도시에까지 다녀왔다. 집에 가서 가족들이 마련한 음식을 먹고 접견을 하고 나서 부근에 있는 교도소에서 숙박하고 돌아왔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였지만 그 후유증은 오래 남았다. 귀휴를 다녀온 이들은 가정의 따뜻한 밥상과 식구들의 정겨운 웃음 소리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 귀휴를 다녀오면 우리는 모두 복도 쪽으로 뚫린 시찰구의 창살에 매달려 근무 중인 담당의 발자국 소리에 신경을 쓰면서 나직한 소리로 통방을 했다. 당시가 그래도 우리에게는 많이 풀린 계절이고 귀휴의 꿈 같은 경험은 강렬한 유혹이어서 담당들도 일부러 모른 체하고 복도의 반대편 끝으로 가서 순시자가 오나 망을 봐줄 정도였다.

이 선생님 어디 어디를 다녀 오셨어요?

여기서 나가서 고속버스를 타구 갔지.

버스 터미널이 여기서 멀어요?

아니, 다리만 건너면 시 외곽에 있더군. 금방이야, 한 오분도 안걸려.

그때 모두들 침묵을 지킨다. 아하, 정문에서 차 타고 나가 창 밖으로 보이는 포플러 숲 사잇길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거기 고속버스가 있었구나.

수인복 입구 수갑에 포승도 차구요?

다른 방에서 누군가 참견을 한다.

무슨 소리야. 귀휴 나갈 땐 작업복에 새마을 모자를 씌운다구. 얼핏 보면 잘 모를 걸.

나는 잠바까지 빌려 주든데.

즈이들이 챙피할테니까….

하여튼 고속버스가 옛날하구 똑같지요?

나는 첨 타 봤어. 오십 년대에는 없었거든.

가다가 휴게소에서 점심 잡쉈어요?

먹었지. 설렁탕하구 저 뭔가, 점심 전에 옛날 아이스께끼 같이 고기 튀긴 막대길 먹었는데.

으응 핫도그로구나. 그러구요….

서울에서 일단 내렸어. 우리 집은 강원도에 있거든.

여전하지요?

난 잘 모르지. 내가 아는 건 서울역 건물하구 남대문 뿐이니까. 좌우지간 사람이 엄청나게 늘었더군. 무슨 난리가 났나 했어.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더했지. 기차 시간을 기다리느라구 대합실에 앉아 있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온통 여행만 다니는지 제각기 짐을 들구 잠시두 가만히 있지 못하구 왔다갔다….

그는 기차의 창가 쪽에 앉아 있다. 오른편에 강이 흐르고 건너편으로는 솟아오른 산봉우리들과 숲이 보인다. 가끔씩 낯선 읍내가 스치고 지나간다. 고층 아파트들은 백일몽에 나오는 사람이 없는 하얀 성과도 같다. 옆에서 졸고 앉아 있는 호송 교도관이 몸을 기울일 때마다 그의 옆구리에 차고 있는 권총의 손잡이가 이쪽 갈빗대를 건드리곤 한다. 두 사람의 호송자 중에 조장격인 주임은 자꾸 말을 시킨다.

이거 봐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야. 마음 먹기에 달렸잖아. 당신 본처가 기다리구 있다구. 애들도 이젠 같이 늙어갈 나이가 아닌가. 사진에서 봤지? 올망졸망한 손주들이 벌써 다섯이래.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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