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22)

  • 입력 1999년 9월 15일 19시 40분


추위 때문에 체력의 소모가 심해져서 시멘트 벽 안의 냉기에 노출된 귀나 손이나 발가락에 동상이 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감각이 없이 저리고 가려워진다. 양말을 벗고 발가락을 만져보면 차갑게 굳어 있다. 두 손을 맞비비고 발가락들을 오랫동안 주무른다. 귀를 위 아래로 수없이 쓰다듬는다. 솜이 이리 저리 뭉쳐진 관급 이불을 덮고 그 안에 담요를 꿰매어 자루가 되도록 만든 침낭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자고 일어나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풀리질 않는다. 일어나서 허기를 무릅쓰고 철문 앞에 서서 제자리 뛰기를 한 시간쯤 해야만 사지가 부드럽게 돌아간다. 드디어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삼 주가 넘게 버티고나서 이제 부터는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단식의 가장 어려운 마지막 관문인 복식이 시작될 참이다. 하루에 두 차례씩 의무실 보고전에 의거하여 취장 소지가 묽게 쑨 미음을 날라다 준다. 배추잎이 두어 가닥 떠있는 된장국도 들어온다. 미음의 쌀 냄새와 된장내는 향기롭기도 하여라. 이제 지나간 기억들은 모두 사라지고 현재만 남아있다. 그것도 모든 음식물의 냄새와 맛으로만 가득 채워진다. 먹고싶은 것들을 순서대로 종이에 써 보고 그 요리법을 자기 식대로 차례 차례 머릿속으로 실행해 나간다. 나는 이제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본 단식이 삼주 이상 걸렸으니 적어도 열흘 이상은 복식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수인들도 그러고 교도관들도 말하지만 징역에선 먹는 것이 절반 이상 아니 팔십 프로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다. 취장에서 다달이 식단을 짜서 가격과 정량을 공고하도록 정치범들이 싸워서 얻어냈지만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종이에 찍힌 차림표는 그럴 듯 해보였지만 워낙 수인 일인당 부식비가 형편 없고 조리하는 이들도 모두 같은 재소자들이라 겉모양부터 메뉴와는 비슷하지도 않다. 찌개나 국이나 조림이나 건더기만 다를 뿐 거의 똑같다. 건더기는 적고 국물만 잔뜩 들어있다. 이를테면 생선조림이라고 해놓고 부서진 가시뿐인데 국물만이 가득히 식기에 담겨 들어온다. 왈왈이들은 취장에 당부해서 따로 생선 토막들을 건져다가 양념을 덧붙여서 제대로의 조림을 해먹는다. 교무과 도서실에서 많이 빌려다 보는 건 여성지의 부록으로 나온 요리책들인데 나도 초창기 징역 때 많이 빌려다 읽었다.

돌솥 비빔밥을 지어 먹어 볼까나. 당근을 채썰어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하여 볶아주고, 콩나물을 데쳐서 참기름 소금 깨소금으로 양념하고, 쇠고기도 채썰어 갖은 양념으로 무쳐 볶아내고, 애호박은 반달 모양으로 저며 썰어 참기름, 소금으로 간하여 볶아 준다.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고기를 볶다가 고추장과 물과 설탕을 넣어 함께 볶아서 자작하게 조려지면 마지막으로 잣을 섞어 고추장 볶음을 만든다. 돌솥에 밥을 담고 준비한 당근 쇠고기 애호박 볶음과 콩나물 무침을 얹고 달걀을 깨뜨려 얹는다. 돌솥을 불 위에 얹어 밥이 뜨거워질 때까지 두었다가 내려서 볶은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다.

만두국을 끓여 먹자. 밀가루에 소금을 조금 넣고 물을 부어 부드럽게 반죽을 해서는 젖은 헝겊을 덮어 둔다. 숙주는 깨끗이 다듬어 데쳐서 잘게 썰고 두부는 베 보자기에 싸서 물기를 짜고 으깬다. 돼지고기는 잘게 다진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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