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86)

  • 입력 1999년 8월 4일 19시 41분


송과 내가 텐트 자락을 들치고 안에 들어서니까 제법 손님이 많았어요. 우리는 기역자로 꺾어진 안쪽의 비좁은 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그는 고개를 잔뜩 숙이고 뭔가 식품 검사라도 하듯이 식판 위에 늘어놓은 먹거리들을 살펴보는 거예요.

그렇게 눈이 나빠요? 이건 꼼장어, 이건 곱창, 그리고 닭똥집,염통, 하여튼 내가 시킬게요.

에에 그러니까…저는 이런 건 잘 못 먹습니다.

나는 송영태가 겉보기 보다는 입맛이나 비위가 섬약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초급학년의 여학생이라면 몰라도 내 나이 또래의 남자가 곱창이니 내장이니 하는 것들을 못먹는다니 조금 우습잖아요. 나는 놀리는 투로 그에게 말했어요.

비위가 약한가요?

예 저 그게, 알레르기가 있어서 아무거나 먹기는 좀….

그 정도 체질로 어떻게 빵살이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는 소주를 벌컥 들이키고는 벙긋, 웃었어요.

불편한 건 잘 견디는 편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일을 잘 견디세요?

뭐…다 잘 견디지요. 길에서 노숙을 한다든가, 며칠씩 굶는다든가.

그래 봤어요?

그전에 땡전 한푼 없이 한 두어 달씩 돌아다닌적두 있지요.

참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잠시후에 내가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 지도 모르면서 그를 아까보다는 훨씬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술과 안주가 나오자마자 출출했다면서도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줏잔만 연거푸 집어다 입에 털어넣는 거예요. 마치 잔째로 목구멍 속으로 넘겨버릴 듯이 말이지요.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어느 틈에 우리는 소주 세 병을 마셨어요. 내가 한 병쯤 마셨을까. 그가 다시 한 병을 시키는 거예요. 나는 손을 내저었어요.

그만, 그만해요.

인제 시작인데 그만이요? 딱 한 병만 더 먹구 미련없이 술 끊읍시다.

취한 거 아녜요?

취하다니 무슨 흰소리를 하십니까? 저는 마시다가 졸기는 해도 취하진 않는 체질입니다.

어쨌든 그는 마지막 한 병을 더 시켜서 처음처럼 벌컥 털어 넣었어요. 그러다가 술병에 술이 손가락 한마디만큼 남았을 제 돌아보니 그는 예고한대로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어요. 아, 이 물건을 어떻게 처치한담. 나는 정말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올라와서 그의 미친 놈 같은 산발의 곱슬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고 혼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꾹 참았지요. 포장마차 부부네 눈치도 보이고 창피하고 난처했지만 그냥 버려둘 수도 없어서 그 녀석을 끼고 질질 끌면서 계단을 오르고 간신히 내 화실의 응접실 소파 위에다 부려놓고는 하도 성질이나서 마주 앉아 담배 한 개비를 태워 물고는 내뱉었어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그러나 그는 축 늘어져서 입맛까지 다시며 긴 의자 위에 널부러져 있는 거예요.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나니까 부아가 좀 가라앉았어요. 나는 먼저 내 의자가 더럽혀질테니 그의 구두를 벗기고 안경을 벗겼어요. 그리고 그의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유리창을 내 눈 위에 갖다 대보았지요. 어머나, 뿌옇게 흐리기만 할뿐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안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아 주고 응접실의 불을 껐습니다.

(글 :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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