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원순/「혹시나」검찰…「역시나」

  • 입력 1999년 8월 2일 19시 26분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온갖 서리의 경험을 한다. 밀서리, 수박서리, 심지어는 남의 집 닭장에서 소리 없이 닭을 꺼내오는 닭서리까지 안해 보는 것이 없다. 요즘 그런 서리는 절도죄로 고소당하기 일쑤지만 인심 좋았던 옛날에는 악동들의 소행으로 그냥 넘어가곤 했다.

▼횡행하는 각종 리스트▼

낙동강의 한 지류를 건너 시오리나 되는 읍내 중학교까지 걸어 다니던 필자는 소풍을 갈 때마다 집에서 어머니가 싸주신 계란 외에 한가지 간식을 더 준비해간다. 바로 땅콩이다. 그런데 이 땅콩서리는 좀 유별나다. 그 줄기를 그냥 잡아당겼다가는 걸려오는 땅콩이 별로 없다. 먼저 모래밭에 흐트러진 줄기 위를 한참 쿵쿵 밟고 난 뒤 잡아당겨야 땅콩이 주르륵 다 달려나온다. 모래흙이 조금은 붙어 있는 상태로, 그리고 볶거나 말리지 않은 생땅콩을 씹어먹는 맛은 그런 악동들만 안다.

요즘 우리나라에 횡행하는 리스트가 많다. 한보리스트에서 기아리스트, 청구리스트를 거쳐 최근의 최순영리스트, 경기은행리스트까지. 그 리스트란 다름아닌 뇌물수수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의 명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문제가 된 적은 한번도 없다. 처음에 잘못 걸린 사람들만 몇사람 ‘사법처리’되고 나머지는 시간이 갈수록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최근의 경기은행 퇴출을 둘러싼 의혹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지검이 ‘권력의 실세’라고 하는 임창열지사와 그 부인 주혜란씨까지 기세좋게 구속할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제 검찰이 바뀌나 보다 하였다. 그러나 ‘혹시나’ 했던 국민의 기대는 ‘역시나’로 바뀌고 말았다. 검찰은 최기선인천시장이 서이석 전경기은행장으로부터 퇴출무마 등 부탁과 함께 2000만원을 받고 이밖에 명절 떡값 등 명목으로 받은 액수까지 합쳐 모두 4500만원을 수수한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단순히 떡값 또는 정치자금 등의 명목으로 불구속수사 처리하고 말았다.

사실 경기은행 퇴출무마사건은 국민에게 줄기에 달린 땅콩이 얼마나 달려나올지 인기 있는 텔레비전 연속극보다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주혜란씨가 먼저 등장했고 이어 임지사가 등장했다. 이들은 결국 경기은행이 퇴출되자 그 돈을 반환했는데 그 거액은 또 어디서 마련했는지 검찰이 수사중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4억원이나 되는 돈을 받은 주혜란씨가 그 돈을 어느 선에 주고 퇴출을 막기 위한 로비를 벌였는지도 당연히 수사대상이었다. 이제 땅콩이 줄줄이 달려나올 판이었다. 거기에 이영우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미주 아태재단’이라는 새로운 땅콩줄기의 등장이었다. 여기에 걸려나온 땅콩이 대통령부인 이희호여사의 장조카이자 아태재단 미주지부장 이영작씨였다.

▼비리 줄기는 못캐나▼

서이석 전행장, 로비스트 이영우, 이영작씨 등이 함께 만난 사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검찰이 조금만 더 줄기 위를 쿵쿵 밟기만 하면 더 많은 땅콩이 걸려나올 듯 싶었다. 그러나 이영작씨는 출국하고 말았고 그 땅콩 줄기는 덮어졌다.이어서 최기선시장이 출연했다. 그런데 돈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도 한번 들어갔다가는 다시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검찰청사 문을 열고 그는 당당히 걸어나왔다.

물론 땅콩 소출은 엉망이었다. 대한민국 검찰이 땅콩서리법을 몰라서 그렇게 수사했을 리는 만무하다. 일반 상식을 가진 국민은 검찰이 걷어낸 그 땅콩 줄기에 미처 딸려나오지 않은 땅콩들이 땅밑에 수북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에다 따라나온 알찬 땅콩마저도 쭉정이라고 그냥 일부러 던져버렸음을 안다. 세상에 2500만원이 어떻게 떡값이며 어떻게 2000만원을 대가성없이 주고받는단 말인가. 서이석 전경기은행장은 고위공직자들을 상대로 한 자선은행이라도 차렸다는 것인가. 일반 하위직 공무원들은 100만원만 받아도 뇌물죄로 구속되고 파면되고 경을 친다. 이 나라 법은 거미줄이라는 말이 있다. 약한 파리나 잠자리만 걸리고 힘세고 덩치 큰 새들은 통과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특별검사제가 입법되는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는 대한민국 검찰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먼저 교도소에 들어가 앉은 임지사부부만 땅을 치고 곡을 하게 생겼다.

박원순<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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