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향기]조정권 「無明 」

  • 입력 1999년 8월 1일 19시 21분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으므로 어둑어둑해오고 있으므로 정결하게 유리창을 닦았다. 등불과 목조의자를 창가에 내다놓았다. 이 빗속을 젖어서 올 그분을 위하여, 안으면 안을수록 젖어 있을 그분을 위하여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다만 마음의 수식어를 잘라내며 정숙하게, 그리고 정결하게 정적속으로 길을 열고 들어가 마중나갈 뿐.

―시집‘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문학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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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잠겨드는 빗소리는 때로 누군가의 발자국소리 같다. 비가 내리는 날은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자꾸만 문 밖을 내다보게 된다. 그러다가 점점 무슨 말씀같이 바뀌는 빗소리. 문을 등지고 앉아 귀를 기울인다. 어떤 말씀이 저 빗속을 걸어오시는지. 시인은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다. 다만 마음의 수식어를 잘라내며 정숙하게… 길을 열고 들어가 마중나갈 뿐이라고. 길을 열고? 길을 열고? 길을 열고!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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