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58)

  • 입력 1999년 7월 2일 19시 22분


저 먼 곳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고 사모님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기진해서 사지를 늘어뜨리고 누워있는 동안에 그네는 아가를 함지에 담아 씻기고 포대기에 곱게 싸서 내 곁에 뉘어 놓았지요. 나는 아가를 향하여 모로 누워서 그것의 가녀린 물 같은 손가락을 만졌습니다. 곰실거리며 움직여요. 두 눈은 꼭 감고 가끔씩 입맛이라도 다시는 꼴처럼 흔적만 있는 입술을 옴찔거리기도 하고 낮고 가냘프게 소리를 내기도 했어요. 아가의 포대기 위에 무엇이 투두둑 떨어져서 언뜻 놀라기도 했는데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이 저절로 눈물이 솟아나와 내 볼 위로 스물스물 흘러 내려오는 거예요. 나는 다시 천장을 향하고 누워서 불빛 때문에 한 팔을 이마에 얹고는 처음처럼 아무 느낌도 없이 울었습니다.

이쁜 애기 낳고 머땜시 울고불고 한가.

그 새에 미역국을 끓여서 상에다 받쳐들고 들어오며 사모님이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그냥 팔을 얹어둔 채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조금 더 눈물이 났지요.

애기 아부지 보고잡어서 그런중은 알지마는…이런 날 복 나가네.

정말 무슨 느낌이나 슬픔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감동과 기쁨의 그것두 아니었구요. 파장 무렵의 시골 장에서 말라 비틀어진 깻잎을 수십 장씩 묶어서 작은 판자때기 위에 올려두고 앉아서 멍하니 앉았던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은 아낙네의 눈빛이 생각나요. 한쪽 무릎을 세워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는데 아기는 젖을 느슨하게 문 채로 잠들어 있는 것 같았지요. 땟국이 꾀죄죄한 찢어진 런닝셔츠 아랫도리는 벌거벗었는데 아기도 엄마도 그냥 멍하니 정지되어 있었어요. 그들은 어째서 거기 그냥 앉아있는 걸까.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이 깻잎을 팔려고도 장터를 떠나려고도 하지않고. 그들이라면 웃지도 울지도 않을테지만. 나도 모르겠어요. 어째서 은결이를 낳고 누워서 그 아낙네를 기억해냈는지.

어여 묵소. 미역국을 먹어 둬야 젖이 나온께.

사모님이 내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일으켜서는 밥상 앞에 앉혔습니다. 나는 물끄러미 상을 내려다보다가 수저를 들고는 허기진 듯이 후루룩 후루룩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아가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당신이 유폐된 것과 동시에 하늘은 우리에게 아름답고 작은 징검다리를 놓아준 셈이었지요. 나는 아무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않고 은결이가 백일이 될 때까지 둘이서만 지냈어요. 그러고나니까 계절은 당신과 내가 가장 평온하게 보냈던 지난 초여름으로 되돌아와 있었어요. 나는 은결이를 업고 언덕 너머 우리들의 빨래터에 데리고 가서 물가의 나무 그늘 아래 폭신한 포대기에 눕히고는 하루 종일 빨래도 하고 도시락도 먹고 담배 한 대씩 피워물기도 하고 그애와 이야기도 했지요.

은결아, 저건 개구리야. 너하구 친구가 될라구 온거야.

팔짝 팔짝 뛰어서 포대기 옆에 당도한 앙증맞은 청개구리를 은결이가 또롱또롱한 눈으로 줄곧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개구리에게도 말을 시켰습니다.

엄마 말 잘 듣는 청개구리구나. 너 은결이 찾아왔니?

나는 갓 태어난 이들 어린 것들이 가까이 있는 게 너무 신통했어요. 다들 이렇게 제각기 태어나 한 생 가운데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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