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신일철/부다페스트의 동상묘지

  • 입력 1999년 6월 28일 19시 34분


동유럽의 체코와 헝가리는 소련 점령군이 강요했던 스탈린주의 체제가 해체되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동상들을 무너뜨리고 파냈다.

고딕식 로마네스크식 르네상스식의 건축미를 자랑하는 미도(美都) 곳곳에 이런 흉물스러운 공산주의 동상들이 들어섰던 것은 미려한 건축미와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공간에 대한 공산주의의 횡포였다.

58년 헝가리 자유의거로 소련 공산당 지배에 저항했던 자유수호의 정신이 흐르는 부다페스트시는 스탈린 동상을 조각내고 그 동상의 외짝구두만을 남겨둬 스탈린 주의의 폭정을 기억하기 위해 전시하고 있다.

헝가리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의 동상을 89년에 그 좌대까지 파내버려 동상이 서 있던 자리가 텅비어 있다. 일행 중에서 시사영어사 민영빈 회장이 헝가리인 운전사에게 “저 빈 곳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 운전사는 “마르크스 레닌의 동상이 서 있었는데 모두 공동묘지로 갔다”고 대답했다.

헝가리는 공산 우상들을 파내 부다페스트 교외의 한적한 곳에 모아놓고 속칭 ‘동상 공원묘지’라고도 부른다. 부다페스트 중심가에서 버스로 약 30분 거리를 달리면 바위와 모래의 맨땅위에 우중충하고 음산한 붉은 벽돌 담을 쌓고 그 안에 약 40개의 동상 비석이 전시돼 있다. 아픈 기억에 대한 아이로닉한 조크를 이 동상묘지에서 엿볼 수 있다.

동상묘지 입구 매표소에서는 기념품을 팔고 있다. 공산 지배에 대한 조크가 담긴 티셔츠가 눈에 띄었다. 셔츠 앞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위쪽에 “The simple redband, World Tour’라고 쓰여있다. 선전 선동의 단조로운 이데올로기만 연주하는 악단의 세계 연주여행, 즉 소련제국 판도 넓히기(1917∼79년)를 야유하고 있다. 뒷면에는 소련군이 점령해 적화시켰던 위성국가명을 나열하고 공산화 연도를 표시했다. ‘코리아 1948’이라 써있고 끝에는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 그 다음은 ‘?’로 돼 있다. 이미 소련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이곳 한산한 야외 노천 전시장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은 역사의 죄인처럼 서 있었다. 우리 일행 외에 관광객은 없었다. 이 동상들이 제 자리에 서있을 때에는 살아있는 것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뽑히고 자빠져 트럭에 실려올 때는 시신이 돼버렸고 이 야유적인 공동묘지에서는 손가락질 받는 수모와 오욕의 대상이다. 역시 자유 헝가리의 정신은 93년 동상공원묘지를 조성해 그 아픈 과거를 용서하되 결코 잊지 말자는 교훈으로 삼았다.

한때 기세당당했던 붉은 우상들이 공동묘지에 감금된 처량한 모습을 보고 공산주의에 대한 역사의 심판을 다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우리 북녘에서 70여개의 김일성 부자(父子) 동상과 ‘백두산 3장군’ 말씀판 등을 한 곳에 몰아 동상 비석공동묘지로 만들려면 부다페스트의 그것보다 훨씬 큰 대규모의 공간이 확보돼야 하겠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신일철(고려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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