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여성특집]장한지여사 가문의 여인들

  • 입력 1999년 5월 21일 10시 58분


깔끔한 파마 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조금씩 엿보이는 장한지 여사는 한때 마오쩌둥 주석의 영어선생이었고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을때 중국측 통역이었다. 그녀의 할머니에서부터 그녀의 딸에 이르기까지 여인 4대가 걸어온 길은 그 짧은 기간 중국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도약을 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중국에서만큼 여성의 힘이 급속히 성장한 곳은 없다.

중국에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심해지기 시작한 것은 서기 1천년경이었다. 유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여성들은 삼종지도를 따라야 했고 남편이 죽어도 재혼을 할 수 없었다. 송나라 시대의 유명한 유교학자인 쳉하오는 “과부가 굶어죽는 것은 별일 아니지만 정조를 잃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말할 정도였다.

장한지 여사의 할머니는 이런 전통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던 시절에 수저우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용감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20세기초에 어린딸 지쿠이젠을 데리고 시골에서 상하이(上海)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갖은 고생 끝에 상하이 최고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게 되었다. 지쿠이젠은 그곳에서 학자이자 법률가이며 기혼남인 장쉬자오를 만나 그의 둘째 아내가 되었다. 지쿠이젠은 그때까지도 전족을 하고 있었다. 장한지는 그들이 입양한 딸이었다.

공산혁명이 일어난 후 장쉬자오는 인민회의 지도부에 합류하여 지쿠이젠과 장한지를 데리고 베이징(北京)으로 이사를 했다. 장한지는 그 곳에서 외국어대를 다녔고 베이징대 교수인 홍주난과 결혼을 했다.

1962년 마오쩌둥의 70회 생일파티에 참석했던 장한지는 그로부터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녀의 실력에 감탄한 마오쩌둥은 1970년에 그녀를 외교부 직원으로 임명했다. “중국에는 여성 외교관과 여성 대변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녀의 딸인 훙후앙은 12세 때인 1973년에 중국 젊은이들을 해외에서 교육시키는 실험적인 프로그램에 의해 선발된 28명의 아이들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대학을 마친 뒤 중국으로 돌아와 금속 무역업을 했다. 그녀는 현재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한 자문회사의 파트너중 한사람이다.

여성에 대한 시각을 놓고 보면 장한지는 생각이 트인 전통주의자이고 홍후앙은 현대적인 개인주의자이다. 장한지는 작년에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자신의 회고록에 ‘폭풍속의 10년:아버지, 남편, 마오의장을 추억하며’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에 대해 훙후앙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면 절대로 그런 제목을 붙이지 않을 거예요. 내가 이룩한 것을 모두 남자들과 연결시키다니요.”

▽필자〓셰륄 우둔:뉴욕 타임스 도쿄 특파원이자 ‘중국이 깨어나다(China Wakes)’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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