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광웅/전직대통령의 바람직한 역할

  • 입력 1999년 4월 7일 20시 50분


지척거리는 한국정치를 보노라면 국민도 힘이 빠진다. 판에 박은 듯 구태를 답습하는 재보궐선거, 그리고 저의가 깔린 듯한 전직대통령의 정치발언 등은 정치에 거는 실낱같은 희망을 앗아간다.

이번 재보궐선거는 작년 여름에도 그랬듯이 금권과 관권 비슷한 선거를 치른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든 이겨보자는 싸움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선거 판을 망쳐놓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치입문 과정이 이 지경이니 이들의 그 후 행동에 기대를 거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정치개혁은 이래저래 물 건너 간 듯한 인상만 남긴다. 여기에 전직대통령이 부정적으로 가세하면 좁디좁은 정치지형은 정말 찢어지고 만다.

◇ 외국 前대통령의 모습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은 그제 퇴임 후 정치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적 견해를 피력했다. 의원들 빼가기나 언론통제 등 독재자나 할 수 있는 일을 해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고 현직 대통령을 비난한 것이다. 김전대통령의 비판이나 비난은 어느 특정지역의 사람들 내지는 선거 때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를 뿌리째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정치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하나는 전직대통령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영수회담이나 또는 이들이 함께 청와대에 가서 회식하는 것이다.

영수회담은 정당간에 풀어야 할 숙제를 우두머리에게 미루는 국회무용론의 한 표상이다. 실제로 끝나고 나면 해석도 다르고 약속도 지켜지지 않아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만남이다. 회담 말고 전 현직 대통령이 앉아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드는 것은 어찌 보면 정다울 수 있겠으나 지극히 형식적이고 그 이후로는 은근히 헐뜯기를 예사로 한다. 이번 경우는 은근히가 아닌 노골적인 도전이다.

이 나라에선 역대 대통령간 관계를 포함해서 어느 자리이건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다고들 말한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타율적으로 물러났으니 그럴 것이고 그 후에도 귀국의 소원을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들어주지 않았다.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이나 장면(張勉)총리의 관계는 전후임자간의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 갈등은 극에 달했고 또 이들과 후임자의 관계 역시 그 후 선거에서 경쟁관계로 온전치가 않았다. 박정희대통령은 후임자와 어색한 관계를 겪을 새도 없었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대통령의 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이들과 김전대통령과의 관계 역시 그 이유를 살피지 않아도 냉랭하다는 것을 잘 안다.

◇ 비난말고 도와줘야

전직 대통령들에게 정치현실로부터 초연해야 한다고 주문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가 자신의 시각과 기준으로 현실정치를 해석하고 평가해 사안이 꼬인다는 데 있다. 모두들 자신은 잘하려고 했고 또 잘했다고 착각한다. 아무튼 전 현직간 폄훼(貶毁)는 존경받아야 할 어른들의 몫이 아니다. 이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볼 때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왜 남의 나라처럼 학교에 가서 일일교사도 하고, 외국 회의에 가서 연설도 하고, 회의도 주재하고, 현직에게 전화로 자문도 해주고, 국제적으로 인권이며 환경 등 캠페인에 참여하고, 심지어 공구통을 들고 다니며 목수 일도 마다하지 않는 대통령이 못될까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각자 이름이 붙은 전문대학원이나 정치도서관 하나 남기지 못하고 은둔 아니면 요란 떨고 다녀야 하나 연민의 정조차 생긴다.

국가와 정부는 당대에 그 지향하는 정책의 성격에 따라 운영원리가 같을 수 없어 전임자의 눈에는 생소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권을 탄압했다든가 부정선거를 했다든가 하는 것은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잘한 것은 아니다. 현직은 자신의 권위와 권한으로 고칠 것은 과감히 고치는 일에 진력해야 할 것이고 전직 역시 당시든 지금이든 국가와 정부에 대해서 공동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려운 일은 위로하며 도와야 할 것이다. 이제 “역시 나보다 낫다. 나더러 하라면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는 전직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싶다.

김광웅<서울대교수·정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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