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21/부패문화를 바꾸자]『「기름칠」해야 일처리돼요』

  • 입력 1999년 3월 24일 19시 03분


《“사람 하나 구워삶지 못해.”

국내 기업에서 오너가 부하직원을 닦달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대부분의 기업은 일이나 프로젝트 진행이 잘 되지 않을때 그 이유를 직원의 로비력 부족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합리적 거래 조건이나 제품의 경쟁력은 제쳐두고 오직 공무원과 거래처 직원을 구워 삶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믿고있다. 이런 토양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뇌물성 접대문화’가 번성해왔고 접대에 드는 비용이 제품에 전가돼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일부 직장인들은 숙취예방제까지 마셔가며 접대를 하는 바람에 건강이 악화되고 가족의 행복마저 위협받고 있다. 또 접대문화에 기생해 전국에 4천여개의 룸살롱, 1만3천개의 단란주점으로 대표되는 향락산업이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다. 외국기업도 한국에서 장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해야한다는 우리 접대문화의 실태와 개선방안을 점검해 본다.》

▼접대실태

지난해 재개발조합 비리를 조사하던 서울지검 수사관계자는 한 건축업자로부터 영수증 다발을 압수했다. 건축업자가 재개발조합 간부들을 접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영수증이었다. 이 건축업자는 조합간부 13명에게 저녁 식사와 룸살롱에서 술을 접대하고 성적 향응을 베푸는데 1천7백여만원을 썼다.1차 고급식당, 2차 룸살롱, 3차 호텔로 이어지는 ‘풀 코스 접대’는 1인당 1백만∼2백만원이 기본이다. 이른바 ‘촌지’는 포함되지 않은 액수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접대를 주고 받는 것일까. 서울 강남 테헤란로 한 룸살롱의 사장은 “손님 10명중 9명은 접대와 관련해서 온다”고 말한다. 공무원과 정치인만 접대받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에서 좋은 매장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의류회사 직원은 백화점 직원을, 병원에 약을 납품해야 하는 제약회사 직원은 의사를, 대출을 받으려는 기업인은 금융회사 직원을 접대한다. 룸살롱 사장도 세무공무원 경찰 조직폭력배를 자신의 가게에 불러들여 접대를 한다. 결국 이권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뇌물성 접대는 퍼져 있다.

민간업자들은 공무원 접대가 가장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공무원 접대의 철칙은 공무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것.

“접대 중 기분나쁜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고 혼자 화장실에 가서 분을 삭이고 와서 다시 웃는 얼굴로 대합니다. 공무원이 생사여탈권을 틀어쥐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중소건설업체 사장)

“술좌석에서는 절대로 ‘사업’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술맛 떨어진다고 하니까요. 접대를 마친 다음날 아침 ‘잘 들어가셨느냐’며 속칭 ‘해피 콜’을 하면서 넌지시 ‘민원’사항에 대해 얘기를 하면 대부분 ‘걱정 하지 말라’고 화답을 해줍니다. 이때도 별말이 없으면 ‘해장을 하자’며 점심접대를 다시 해야죠.”(S종합상사 부장)

접대방법도 다양하다. 최근에는 공무원을 박람회나 세미나 등 행사에 초청하는 형태로 외국에 보내주는 ‘외유접대’도 성행하고 있다. 거래처의 고위 임직원에게는 골프접대가 성행이다. 경비부담은 물론 고액의 내기골프를 해서 고의로 돈을 잃어주는 경우도 있다.

국세청이 지난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97년 국내 법인세 납부기업은 총 3조5천억원을 접대비로 지출했다. 이 수치는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액수와 기업인이 아닌 민원인이 공무원을 접대하는 비용이 빠진 것. 전문가들은 실제 접대비를 공식수치의 3∼5배로 보고 있다.

▼과잉 접대문화의 유래

이른바 ‘뇌물성 접대’가 시작된 것은 70년대초 상품경쟁력이 없는 우리 기업이 해외 바이어를 접대하면서부터라는 것이 업계의 이야기다. 해외 바이어가 김포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출국할 때까지 ‘풀 코스’로 접대하는 것이 당시 국내 수출기업의 ‘생존전략’이었다. 70년대 바이어와 수출업자간의 접대문화가 이젠 각 분야에 퍼져 생활의 한 부분이 됐고 부패와 비리의 원천이 됐다.외환위기 이후 외국 학자들과 언론은 줄곧 아시아의 부패를 “인간관계와 혈연 지연 학연이 얽힌 연고주의가 부패문화와 결합돼 각계의 투명성이 결여돼 있고 이것이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없는 주요 원인”이라고 질타했다.

다국적기업마저 한국에서 영업을 할 때는 뇌물성 접대를 하는 웃지 못할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국내 지사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라는 항목을 만들어 접대비를 지출하고 있을 정도다. 이 회사 사장은 본사 고위층으로부터 “한국지사는 왜 엔터테인먼트 비용을 많이 지출하느냐”는 질문을 받기 일쑤다.

▼외국의 접대문화

바이어에게 황제대접을 해주던 우리 기업인들은 해외에 나가서도 그같은 대접을 받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처럼 온갖 향응을 베풀어주는 접대문화를 가진 곳은 드물다. 우리보다 접대의 정도가 훨씬 약한 일본도 최근 검찰이 기업인들로부터 요정에서 접대를 받은 대장성 관리들에 대해 “과잉접대는 뇌물에 해당한다”며 사법처리를 한 뒤 접대문화가 크게 바뀌고 있다. 슈퍼마켓 체인을 거느리고 있는 세이유(西友)그룹은 지난해부터 공무원이나 타 기업접대를 모두 금지시켰다.

유럽이나 미국 기업은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 접대의 전부다. VIP(귀빈)의 경우 박물관을 안내하거나 유명 오페라나 뮤지컬을 보여 주는 등 ‘문화적 접대’를 통해 깊은 인상을 심어주곤 한다.

IMF체제 이후 국내 대기업에서도 조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주요 종합상사는 바이어에게 민속촌이나 고궁을 구경시켜주고 부인용으로 10만원 미만의 문화상품을 선물하는 등 적은 비용으로 깊은 인상을 주는 방식으로 접대문화를 바꿔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박한 접대문화는 아직 변화가 없다. 국세청은 금년부터 1회 5만원 이상 접대비는 신용카드 매출전표를 받아야만 손비처리해 주기로 했지만 이로 인해 뇌물성 접대문화가 수그러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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