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21]부패문화를 바꾸자…공직 뺨치는 민간비리

  • 입력 1999년 3월 10일 19시 24분


《부패하면 우리는 우선 공무원을 떠올린다. 그러나 과연 공무원만일까.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자, 한국업체와 거래해본 경험이 있는 외국업체 관계자들은 “한국의 대기업 내부에서 벌어지는 민간부패도 공무원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 임원은 물론 중간간부들도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거래업체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회사자금을 횡령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IMF체제 이후 직장의 안정성이 흔들리면서 일부 대기업 임직원 사이에서는 ‘좋은 자리에 있을 때 한몫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지난 94년부터 기업 윤리규범을 만든 LG전자는 요즘도 규범의 실천지침을 강조하고 점검하고 있다. 윤리규범 실천지침을 전담하는 곳은 감사팀. 이 팀은 주로 대외 업무가 많은 영업 구매팀을 집중 감시한다. 하청거래업체들을 방문해 설문조사를 하거나 개인 인터뷰를 통해 본사의 금품 수수나 향응 제공을 잡아낸다. 윤리규범에는 금품수수금지 조항이 들어있다. 적발될 경우 정직 감봉, 심지어는 해고까지 시키는 경우도 있다.

“다른 기업에 앞서 5년째 이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도 ‘관행’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이 회사의 고민”이라고 한 관계자는 토로한다. 삼성그룹의 감사팀은 임직원과 조직의 부정과 비리적발에 정평이 나있다. 그래도 허점은 많다고 한다.기업내부에서 벌어지는 민간부패는 적발이 어렵고 회사차원에서 이미지 손상을 우려해 내부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외부에 거의 공개되지 않는다. 그래서 민간부패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뿌리가 깊고 유형도 다양하다.

■노골적으로 손벌리는 대기업 임직원

통신기기 제조업을 하는 중소기업체 사장 김모씨(45·서울 강남구 논현동)는 1월초 어이없는 경험을 했다. 평소 안면도 없는 30대 초반의 모건설회사 대리가 찾아와 ‘부정한 거래’를 제의한 것.

그는 “당신네 회사 제품 1억원어치를 1억3천만원에 살테니 추가된 3천만원에서 세금과 수고비를 뺀 2천만원을 현찰로 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김씨는 고민하다 거절했고 손해를 봐야 했다.

대기업에 필름 관련 원자재 부자재 포장자재를 납품해온 중소기업체 사장 박모씨(46)의 얘기.

“대기업이 수천억원 규모의 대규모 시설투자를 시작하면 비리는 극에 달한다. 대기업 구매담당자는 납품업자들의 상전으로 군림한다. 언젠가 대기업이 실시하는 입찰에 참가했는데 구매 담당자가 밖으로 조용히 불러내더니 ‘제품의 질은 약간 떨어지지만 구매해줄테니 알아서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납품대금의 5%를 뇌물로 건네주었다. 어떤 구매담당자는 아예 한달에 얼마씩을 정기상납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급순위 50위권의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최모씨(33)는 “평소에 사업을 발주하는 담당자를 얼마나 구워삶느냐가 결정적인 순간에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그는 구정 추석 등 명절과 여름휴가뿐만 아니라 수시로 2백만∼3백만원씩의 금품 등을 건네고 적절한 접대를 한 결과 중요한 입찰때 마다 담당자로부터 ‘예정 낙찰가’를 귀띔받곤 했다는 것.

중소기업협동중앙회 이영삼(李永三)산업진흥부장은 “몇해 전 하도급을 받은 중소기업 25개사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원사업자 담당부서에 연간 평균 1억원의 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조사됐다”며 “‘누이좋고 매부좋은 식’의 그릇된 공생(共生)의식이 기업부패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여름휴가 때면 종합상사의 수출팀 직원은 거래 제조업체 수출담당자의 집앞에 승용차를 대놓고 서로 모셔가느라 난리를 피운다. 수출 실적도 올리고 수수료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 대기업에서 관공서를 출입하며 공무원을 상대하는 대관(對官)업무도 공직사회의 부패를 조장하는 전형적인 민간부패의 한 모습이다.

■IMF시대의 부패 증후군

IMF체제 이후 경영합리화 바람으로 직장의 안정성이 흔들리면서 ‘한탕주의’를 노리는 임직원들도 나타나고 있다. 내부감사가 엄격해 비리가 적기로 소문난 국내 굴지의 한 건설업체 이사는 IMF체제가 닥치면서 하도급 중소업체 사장 이모씨(46)에게 2억원을 요구했다. 압력을 받은 이씨는 고민 끝에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씨는 “최근 앞날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많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임직원들이 회사일은 적당히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부업에 더욱 신경을 쏟는 것도 IMF가 낳은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Moral Hazard)’의 하나.

H그룹의 한 관계자는 “회계팀에 근무하는 일부 직원들은 퇴근 후 중소기업에 가서 회계일을 봐주고 낮에도 전화를 걸어 업무협의를 하는 등 회사에서 알지 못하는 업무 누수가 심각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대안은 없나

지난달 기업부패 라운드가 발효되면서 ‘기업윤리강령’을 제정하는 대기업이 늘어나고 또 기업부패 관행을 근절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LG전자 감사팀의 한 관계자는 “금품이나 향응 제공으로 거래선을 선정할 경우 협력업체를 제대로 육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제품을 납품받게 돼 회사의 경쟁력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고 말했다.

경실련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김한기(金漢基)부장은 “내부고발을 활성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강구해야만 기업부패를 줄여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윤리학회의회장인 경희대 김성수(金聖壽·경영학부)교수는 “국내 기업간 거래의 비윤리적인 문제가 국제 거래 및 대외신용평가의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하루빨리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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