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햇볕정책의 그늘

  • 입력 1999년 3월 9일 19시 04분


검은색 서류가방을 들고 서울에 왔던 미국의 윌리엄 페리 대북(對北)정책조정관이 어제 저녁 김포공항을 떠났다. 서울체류 1박2일, 페리의 가방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외교의 겉과 속은 항상 다르다. 교섭 당사자들이 얼굴까지 붉히는 말싸움을 했어도 발표는 ‘솔직한 의견교환을 했다’는 식이다. 외교적 언사는 한겹 접어두고 들어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페리의 이번 서울 방문 성과도 발표된 내용만으로는 사실을 알기 힘들다. 감만 잡힐 뿐이다.

▼ 페리의 서류가방 ▼

이달말 쯤 백악관에 전달될 페리보고서의 골격은 거의 드러나 있다. 쉽게 말해 북한이 핵과 미사일문제 해결에 협조한다면 미국은 그에 상응하는 호의적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는 내용이다. 한미간 쟁점은 바로 이 ‘어떻게 한다’는 부분이다. 무력사용으로부터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는 무시정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재방안들이 ‘어떻게 한다’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채찍문제를 거론하다 혹시 북한을 자극하지는 않을까 초조해 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이번 페리측과의 협상에서도 채찍문제에 대해서는 남달리 신중한 태도였던 것 같다. 한국정부의 이같은 자세를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다. 채찍은 기필코 한반도에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의 우려는 당연하다. 비를 맞아도 직접 맞게 되는 당사자는 한국이다.

그러나 얘기를 좀더 발전시켜보자. 워싱턴측이 일정기간 지난 후 미국이 말하는 1단계전략, 즉 대북 포용정책이 실패로 끝났다는 판단을 내렸을 때, 그때 한국은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까. 미국이 한국의 입장을 전적으로 들을 리는 없다. 2단계 전략인 대북 강경정책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방관만 하고 있을것인가. 서울의 한 외교관은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한국이 ‘은근한무시정책(Benign Neglect)’이나 ‘그럭저럭 넘어가는 정책(Muddle Through)’을 취하려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Benign Neglect’는 외교적 용어로 무책이 상책이라는 말 뜻을 갖고 있다. ‘Muddle Through’도 얼렁뚱땅 넘긴다는 뜻이다. 이 외교관이 묻는대로라면 세월에 모든 것을 맡겨보자는 것이 곧 2단계 전략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응이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해결의 열쇠가 되지 못한다면…. 과거 김영삼(金泳三)정부 때의 대미(對美)외교를 되풀이할까. 김영삼정부는 미국의 대북태도가 강경해져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될 기미가 보이면 위싱턴으로 사람을 보내 진화외교를 펴곤 했다. 미국의 허리춤을 잡는 외교였다. 당시 한국 정부는 한반도 긴장이라는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을 곧 공격할 듯하는 미국의 성화를 가라앉히는 것이 급선무일 수밖에 없다.

▼ 포용정책 실패 대비를 ▼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북한이 그들식 표현대로 또다시 인공위성이라도 발사한다면 어떻게 할까. 한반도 주변상황은 뻔하다. 아무리 인공위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해도 일본 자위대는 곧장 전투태세에 들어갈지 모른다. 미국의 태평양함대가 동해로 들어와 무력시위를 벌이고 워싱턴 정가에서는 다시 북한 폭격론이 고개를 들 것이다. 그래도 한국은 침묵만 지킬 것인가. 미국과 일본의 정서에 무턱대고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다른 선택의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막연하다. 여기에 대한 힌트를 슬쩍 비친 것이 최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타임스 회견이다. 이 회견에서 북한의 미사일개발을 규제할 아무런 국제적 권한이 없다고 한 김대통령의 말은 의미심장하다.북한이다시 미사일을 발사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물론 그러한 시나리오까지 안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2단계로 사태를 발전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과 미국의 속사정을 모를 리 없다. 아무리 식량사정이 급하고 외자가 궁해도 벼랑끝 외교를 구사할 카드는 항상 그들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필요하다면 의도적으로 미국의 2단계정책을 유도해 낼 가능성마저 크다. 솔직히 말해 북한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무책이 상책은 아니다. 햇볕정책의 뒷 그늘에 대한 대비가 너무 소홀한 게 우리의 대북정책이다. 2단계에 가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이미 때가 늦다. 그것이 페리가 서류가방에서 꺼내 놓고 간 메시지 아니겠는가.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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