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6)

  • 입력 1999년 1월 6일 18시 59분


누렇게 퇴색한 사진이 붙은 주민등록증이 한 장. 그 사진에서 젊은 날의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길게 기르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주소를 보면서 예전 북한산 자락에 있던 개나리가 많던 그 집이 생각났다. 그리고 다시 지갑의 다른 날개 쪽에 똑딱단추가 달린 칸을 열었다. 나는 이제야말로 정말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거기 누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주셨던 관음보살의 부적과 함께 거기 작은 반 명함판 사진 한 장이 들어있을 것이다. 단추를 따고 뚜껑을 열었다. 거기 붉은 비단에 싼 관음상이 그려진 부적이 보이고 그 아래 하얀 사진이 보인다. 다시 똑딱단추를 눌러 뚜껑을 닫아버렸다. 여기서는 아무 것도 되돌이키기 싫었다. 나는 지갑을 다른편 안주머니에 넣었다. 반지를 무명지에 끼울 때에야 그네의 손가락이 목소리가 그리고 코가 오똑한 고무신을 신은 그 하얀 종아리가 떠오른다. 이것 봐요, 채송화가 꼭 한송이 맨 먼저 피었어요! 하던 약간 갈리는 듯한 목소리. 그리곤 내게 입가에 손을 세워 보이며 손짓한다. 쉿, 저기 보여요? 저 사과나무 아래 후투티가 날아왔어요. 전화 벨이 울렸다.

아 여보세요? 정문이라구, 알았어.

주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나서 당직계장에게 말했다.

정문에 가족이 왔답니다.

오현우씨 이리 좀 오세요.

계장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석방증입니다. 그리구 오선생은 보호관찰 대상자니까 귀가하고나서 일주일 이내에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계장은 일어나서 내게 정식으로 악수를 청했다.

석방을 축하합니다. 충실한 사회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가 경례를 했고 나는 깊숙이 절했다. 나는 주임과 함께 본관 건물을 나섰다. 싸락눈은 아직도 팔팔 날리는 중이었다. 주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먼 길 가실텐데 길 사정이 괜찮을까 모르겠소.

우리는 정문의 귀퉁이에 있는 작은 출입문을 지나고 다시 교도소의 바깥 울타리가 보이는 초소를 향하여 걸어갔다. 무장한 경교대가 지키고 선 초소 앞의 공터에 앞 등을 켠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초소 앞에 이르자 주임이 걸음을 멈추며 내게 말했다.

자아 여기서부터 속세입니다. 나가서 잘 사세요.

안녕히 계세요. 언제… 만납시다.

그와 나는 그렇게 안과 밖으로 작별했다. 나는 작은 트렁크를 손 바꿔 들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차의 문이 열리면서 조카인듯한 사람이 뛰어 나오더니 빠른 걸음으로 마주 다가왔다.

삼촌 저 정근입니다.

그는 먼저 나를 힘껏 껴안았다.

고생 많으셨지요.

뭐… 잘 지낸 편이다.

그가 비닐 봉지에서 두부를 꺼내어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이거 잡수세요. 어머니가 꼭 드시게 하라구 그러셨어요.

두부… 거 다 미신이다.

이제부턴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하셔야 된대요.

나는 그게 누님의 진심이라고 알아 들었다. 두부는 차갑고 싱겁고 뻑뻑해서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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