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 (61)

  • 입력 1998년 12월 29일 17시 52분


태평성대 ①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흙을 밟아보는 것도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12월 말인데도 햇살은 봄날같이 따뜻했고 코에 스미는 공기 또한 차고 맑았다. 공원묘지 특유의 묘한 정적이 마치 긴 여로를 거쳐 종착역에 닿았을 때처럼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 뿐이었다.

“아직 분양중인가보지? 입주자가 반도 안 찼구나.”

승주가 빈 터만 있는 묘 자리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앞장서서 걷던 조국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쯤인 것 같은데…, 이제부터는 형준이 네가 찾아라. 저기 저 비석들에 너 좋아하는 한문 잔뜩 써 있다. 이름을 보고 찾아야지 못 찾겠어.”

그렇지 않아도 나는 묘석을 눈으로 훑어가며 걷던 참이었다. 조국의 뒤를 생각없이 따라가다가는 어떤 엉뚱한 묘소 앞에다 눈물을 뿌려놓고 돌아올게 될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브라질 사건 이후 대통령이 한 번 더 바뀔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조국과 승주의 말이라면 내 눈으로 확인한 것 외에는 믿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말려들 때 말려들더라도 일단은 의심을 해두는 편이 충격완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두환의 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혼자 능선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어서 마치 수십 기의 묘를 거느린 것처럼 보이는 늠름한 무덤이었다. 조국이 종이봉투에서 부시럭부시럭 소주와 북어를 꺼냈다. 코가 빨갛게 언 채 구부정하게 서 있는 승주의 등뒤로 멀리 하늘이 마치 얼어 있는 푸른 물처럼 번들거렸다. 우리는 무덤가에 소주 한 병을 다 뿌린 다음 우리 몫으로 새 병을 땄다.

두환은 총에 맞았다. 피혁업계의 해외시장을 개척하다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코스타리카에서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이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서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처가의 도움이란 게 생각처럼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영주권을 얻기까지 우리가 흔히 들어본 이야기에서처럼 배달원, 세탁부, 주유원, 베이비 시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직장은 슈퍼마켓이었다. 새벽 두시에 강도의 방문을 받은 그는 어린 강도를 한수 가르치고 선도하겠다는 정의감이 솟구친 나머지 ‘손 들어!’라는 강도의 영어를 못 알아들은 척하고 짐짓 소림사 기본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태권도 동작인 줄 알고 겁을 먹은 강도는 얼결에 총을 발사했다.

돌이켜보면 두환은 우리의 삶에 깊게 얽혔다고는 할 수 없다. 만수산 4인방 시절에도 그는 늘 외곽으로 돌며 다리를 떨었을 뿐 우리가 추진하는 일종의 사업에 깊이 관여한 일이 없었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24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고도 할 수 있다. 그때 이후 그를 만난 것은 딱 두 번뿐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 4인방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오늘의 만남만 해도 그렇다.

셋이 무덤 앞에 나란히 앉아서 종이컵에 든 소주를 홀짝이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두환의 죽음이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두환의 죽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사십줄로 접어든 우리 셋의 그저그런 삶도 마찬가지로 허전하고 무망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란 살아 있는 자로 하여금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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