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72)

  • 입력 1998년 10월 12일 19시 06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⑮

나는 이불을 둘둘 감은 채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텔레비전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잠이 들어버렸다. 규가 돌아왔을 때 시계를 보니 한시간 가량이나 지나 있었다.

―약국이 없었어. 번화한 시내의 중심가까지 가서야 겨우 찾았지.

그는 냉장고 속에 있던 물을 따라 약을 먹이고 이불을 펼쳤다. 잠시 잠든 사이에 멍과 상처들은 한결 부드러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와 상처와 멍이 든 주변을 닦고 조심조심 약을 발랐다. 약을 바르는 동안 규는 괜찮아? 괜찮아? 물으며 나의 입술과 멍과 상처 주변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약냄새와 규의 냄새가 뒤섞이고 까칠한 턱이 나의 턱과 상처와 멍에 닿곤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도 그는 내 얼굴을 빤히보며 그렇게 물었었다. 괜찮아요? 무수한 발을 가진 기나긴 슬픔이 우리들의 부정과 폭력과 상처들의 시간 위로 지나갔다. 이상하리만치 가볍고 나른하고 비현실적으로…. 나는 피가 끓는 듯이 뜨거워져서 그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의 벨트를 풀며 속옷을 벗겨내며 파고들었다. 나는 이미 완전히 열려 있었다. 세상 끝까지.

그의 것이 자궁을 지나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쾌락의 끝에 보라빛으로 회오리치는 내 죽음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 사람은 그 자신이 빠져드는 욕망 속에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의 모습도 선택하는 것이다.

둥근 돌의 해변길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고 출발한 것은 오후 4시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끝까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다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떠나리라는 것을. 휴게소에서 나의 차를 타고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그것이 이제 선택이 아니라 나의 운명이 되었다는 것을. 감정이란 때로 이상한 것이다. 그동안 규에게 느꼈던 열정이란 그것으로 충분할 뿐 나의 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그날 바닷가에서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비장했고 건조했다. 상처들이 따갑고 쓰라려서 이따금 입술을 물고 얼굴을 찌푸렸다. 돌아오는 내내 규 역시 한마디 말도 없었다.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엔가 깊이 빠져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도 이따금 입술을 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신호등은 14번 국도의 통영과 마산의 중간쯤에 있는 삼거리 교차로의 신호등이었다. 약간 내리막길이었고 차들은 한결같이 고속 질주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녹색 신호등이 이제 막 노란 불로 바뀌었다. 규는 자신의 운전 습관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더 밟아 속력을 올렸다. 그러나 시속 110킬로미터쯤으로 달려가던 바로 앞의 흰색 승용차가 예비 신호도 없이 신호등 바로 앞에서 급 브레이크를 밟으며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규는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차를 세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서 있는 흰색 승용차 바로 뒤에서 핸들을 꺾어 2차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차선으로 달려 온 트럭과의 충돌…. 피부가 터지는 듯한 끔찍한 충격뒤에 차가 공중으로 떠오른 듯했다.

차는 핑그르르 돌며 맞은 편 도로에 이제 막 선 봉고차와 택시를 덮쳤고 트럭은 20m쯤 밀려나간 뒤 논바닥으로 튀어나가 뒤집어져 버렸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말짱했다. 차가 팽그르르 돌 때 규와 나는 마주보았었다. 그는 이미 핸들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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