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30)

  • 입력 1998년 8월 21일 19시 23분


제2장 달의 잠행⑥

―아무래도 머리 속 어딘가에 출혈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 정신을 잃겠죠. 그리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거예요.―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에 무엇이 걸린 듯 낮고 깔끄러워진 음성으로 남자에게 꽤 격식을 갖추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를 몰고 떠났다. 모퉁이 길을 돌 때, 사이드 미러를 보니 남자는 그 사이 나의 존재 따윈 까맣게 잊은 듯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신의 차 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잠도 들지 못한 채 오랫동안 누워 있으니 마치 접시들이 깨어진 찬장 속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스러운 기계음이 들렸다. 새소리 사이로 나뭇잎 한 장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들릴 것 같은 고요 속에서는 기계의 굉음조차 반가웠다.

창밖을 내다보니, 쉰 살쯤 먹은 농부가 경운기를 몰고 마당 바로 아래에 옥수수 밭 곁으로 들어가더니 밭두렁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는 날쌔게 일어나 곁의 빈 밭을 갈기 시작했다.

나는 거실을 몇 바퀴 돌며 서성이다가 한 가지씩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발장 문을 활짝 열고 신발들을 모두 들어낸 뒤, 걸레로 선반의 흙먼지를 닦고 신발의 먼지를 턴 뒤 가지런하게 정돈해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마당의 수돗물을 틀어 물을 떠와 현관 바닥에 붓고 솔로 박박 문질러 씻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창틀과 샤시의 먼지를 털고 닦았고, 방과 마루를 청소기로 흡입했고 걸레로 닦은 뒤 마당가의 잡초도 뽑고 세탁물이 담겨 있는 세탁기를 돌리고, 수가 어질러 놓은 방을 정돈했다. 일의 순서 따윈 없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세수를 하고 나왔을 때 설거지거리가 싱크대 속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시 그릇을 씻고 싱크대 속을 정돈하고, 냉장고를 청소했다. 뭔가를 몸 안에서 쏟아내듯이 연속적으로 일을 하고 또 했다. 마지막으로 쓰레기를 태우기 위해 모자를 쓰고 집밖으로 나왔다. 쓰레기터는 집 뒷문을 나가 풀밭 사잇길을 지나 계곡 쪽으로 가야했다. 호경이 비닐하우스에서 쓰고 버린 녹슨 양철 난로를 세워 둔 곳이었다.

그곳에 쓰레기를 넣고 태우면 재도 날리지 않고 주변이 어질러지지 않아서 좋았다. 쓰레기에 불을 붙이고 다 탈 동안 뜨거움을 피해 풀밭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풀밭은 노란 꽃가루를 피운 잡초 떼가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이사이 키 큰 오이풀이 보라색 꽃을 피우고 권태롭게 서 있고 논두렁에는 자잘한 꽃을 피운 쥐오줌풀이 덮여 있었다. 이따금 개구리가 느닷없이 나의 맨 다리 곁에서 튀어 올라 놀라게 했다. 햇볕이 뜨겁고 습기도 많은 날씨였다. 아래 마을이 옅은 수증기에 가려 더 멀고 아슴푸레하게 보였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찔레 덩굴에 긁히지 않게 조심하며 아랫집 땅 끝에 있는 소나무 아래로 가려는데 계곡 아랫길에서 윗집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남자는 젖은 운동화를 끌고 청바지를 걷어올린 모습이었는데 길쭉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자세였다. 그 손안엔 산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둘은 잠시 동안 어쩔 줄 모르는 혼선을 겪으며 마주 서 있었다. 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잔뜩 망설이다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눈으로 나의 스커트를 가리켰다. 아마 나의 두 손이 너무 작다는 뜻 같았다. 침묵과 긴장감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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