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24)/문화예술지원]민간지원이 큰 힘

  • 입력 1998년 7월 21일 19시 21분


2월 김포공항서 공항관리공단 후원으로 열린 한국오페라단의 공항음악회
2월 김포공항서 공항관리공단 후원으로 열린 한국오페라단의 공항음악회
“앞으로는 정치자금에 신경쓰지 말고 남는 돈이 있으면 문화예술에 투자하세요.”

93년 당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청와대에 재벌총수들을 불러놓고 칼국수를 대접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선언’을 계기로 대기업의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본궤도에 오르는 듯 했다. 기업의 문화예술지원 방안을 협의하는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94년 탄생했고 문화예술단체나 개별공연 전시에 대한 기업 협찬도 훨씬 풍성해졌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어떤가. 경제위기 속에서도 문화지원의 여유는 살아남아 있을까.

“음악공연의 경우 대기업의 지원이 작년의 1%도 안될겁니다. 협찬과 후원을 약속했던 기업들이 전부 ‘펑크’를 내고 있어요. 공연예술계가 뿌리째 고사(枯死)할 위기에요.”

공연기획사인 미추홀예술진흥회 전경화(全京華)회장의 말. 그의 말처럼 서울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의 공연 대관신청이 연초부터 대거 취소됐다.

S그룹으로부터 거액의 지원을 받아 문화협찬의 모범사례로 꼽히던 민간 K교향악단은 이 그룹의 지원이 끊기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봉급과 연주료가 제때 지급되지 않자 일부 단원은 악단을 떠났고 ‘최고의 민간악단’이란 위상유지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나 순수예술은 국가 또는 기업체 등의 후원을 받아 꽃을 피워왔다. 악성(樂聖) 베토벤에게 에스테르하치공(公) 등 든든한 후원인이 있었던 것처럼.

‘사회의 문화지원’을 뜻하는 메세나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것은 70년대 유럽. 카네기홀을 설립한 철강왕 카네기의 사례에서 보듯 민간기업이 문화지원을 맡는 미국과는 달리 유럽에선 국가나 지방정부가 예술활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왔다.

두차례의 오일쇼크 이후 경기불황에 따라 세금이 덜 걷히다보니 국가의 문화지원 예산은 계속 쪼그라들었고 유럽 각국 정부는 예술 진흥의 책임을 민간기업에 떠맡기게 됐다. 76년 영국을 시작으로 80년대 초반까지 메세나협의회가 각국에서 앞다퉈 발족했다. 87년 유럽평의회는 “앞으로 정부에만 문화활동을 의존할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미국식 메세나가 문화지원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메세나협의회 발족은 기업 문화지원의 새로운 전기가 됐다. 작년말 현재 1백60여개 기업과 재단이 가입해 공연 전시 등 각종 행사와 예술영재육성 등의 협찬을 위한 정보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메세나’는 힘이 딸려 허덕허덕한다. 문화진흥의 목소리는 국가부도위기와 실업대란의 충격에 묻혀버렸다. 불황바람이 불자 대기업들은 문화지원비에 칼을 먼저 들이댄다.

“콘서트 등을 후원하는 기업에선 반대급부에만 신경을 씁니다. 방송 스팟광고는 몇 회나 할지, 초대권은 몇 장이나 받을 수 있는지만 관심을 가져요. 결국 초대권이 남발돼 공짜심리만 확산되고 유료관객은 줄어듭니다.”(미추홀 전경화회장)

제도도 제기능을 못한다. 문예진흥원 지정기부금제도는 기업이 문화단체를 지정해 진흥원에 기부금을 내면 진흥원이 문화단체에 지원하는 방식. 돈을 부담하고도 ‘생색’을 내지 못하게돼 기업에겐 인기가 없다. 또 수혜대상이 ‘정부로부터 인허가를 받은 문화예술단체’로 정해져 규모가 큰 일부단체만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공연기획사 등은 돈구경을 못한다는 것.

“문화관광부장관이 추천하는 문화예술단체나 예술인도 지정기부금 수혜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돈을 내는 기업에 세금혜택을 많이 줘 자발적인 지원을 유도해야죠.”(양현미·梁現美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연구원)

LG연암문화재단 김주호(金周鎬)부장 등 문화정책 연구자들은 “우리도 영국의 ‘페어링 스킴(paring scheme)’이나 미국 ‘매칭 그랜트(matching grant)’같은 제도를 도입하자”고 제안한다. 민간이 예술계를 후원할 경우 정부도 함께 보조해주는 제도다. 정부 보조비율이 100%인 경우 한 기업이 예술단체에 1천만원을 지원하면 정부도 이 단체에 1천만원을 지원하게 된다.

개인을 문화후원자로 끌어들이자는 제안도 나온다. 미국의 경우 50만개의 비영리재단에서 나오는 기금 14억달러가 매년 문화계 지원에 쓰인다. 돈을 기탁하려는 개인, 기금을 운용하는 재단, 기금을 사용하려는 예술인 사이에 정보가 잘 통하게 시스템이 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변칙상속 등 폐해도 있겠지만 예술지원 활성화 등 더 큰 사회적 이익을 위해 재단설립을 자유화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홍승찬(洪承讚)교수의 주장. 그래야만 문화지원이 경기(景氣)에 따라 들쑥날쑥하지 않고 장기화 체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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