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중국인·중국문화 에세이」

  • 입력 1998년 7월 2일 19시 30분


관청이나 학교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부즈다오(모른다)’.

우체국에서 우편번호를 물어도 부즈다오. 우편번호부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부즈다오.

50년대 반우(反右)투쟁이나 60년대 문화혁명에 관한 질문이 나올라치면 안색이 싹 바뀌면서 단연코, 부즈다오! 부즈다오!

부즈다오를 입에 달고 다니는 중국인들.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즈다오가 먼저 튀쳐나온다. 그런 그들은 집안에선 자녀들에게 ‘볘관스(別管間事)’라고 호통을 친다. ‘쓸데없는 일에 덤벼들지 말라…’.

40년 넘게 중국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쳐온 허세욱교수(고려대). 그가 이런저런 일화를 통해 그려내는 중국인의 초상 ‘중국인·중국문화 에세이’(대한교과서 펴냄).

5천년 중국 문학작품과 문화 속에 배어있는 중국인의 생생한 숨결을 맡는다. 그 많은 중국인―중국론과 중국기행에서 가려지고 감춰졌던 숨은 얼굴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부즈다오와 볘관스에는 부정과 불신 체념 냉담 회피의 정서가 녹아 있다. 여북하면 이런 속담이 전해 내려올까. ‘자기 집 문앞 눈만 쓸면 그만이지 남의 집 지붕 위에 내린 서리는 상관말라… (各人自掃門前雪 莫管他家瓦上霜)’.

근 반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체제 환경과 3천년에 걸친 봉건전제 통치. 그리고 ‘무지무욕(無知無慾)’의 도가(道家) 사상이 빚어내는 자기보호, 자기훈련의 방어망(防禦網)이라고나 할까.

저자가 한번은 털털거리는 고물차를 타고 밤길을 달리는데 탈이 났다. 목적지를 2백㎞ 앞두고 헤드라이트가 고장난 것. 그런데도 운전기사는 태연하기만 하다.

딴에는 수가 있었다. 우두커니 길가에 차를 세워 두었다가 다른 차가 지나가면 그 뒤를 바짝 쫓아가는 것.

앞차의 꽁무니를 따라가다 놓치면 다시 다음 차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다보니 차츰 어둠에 익숙해졌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도 웬만큼 앞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고물차는 그냥 달려서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낙후된 사회와 전제통치 하의 어둠, 우민(愚民)정치의 오랜 강요 아래서 눈과 귀를 막고 살아야했던 중국인들. 묵묵히 기다리면서 ‘밤눈’을 틔워온 굴신(屈身)의 처세학. 그것은 그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어둠과 싸워온 나름의 지혜는 아니었을까.

중국 시인 꾸청이 들려주는 짧은 시 한 편.

‘어둔 밤은 내게 어둔 눈을 주었기로

나는 그 눈으로 광명을 찾는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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