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관을 찾아서⑧]代마다 새로운 作風 개척

  • 입력 1998년 6월 30일 20시 01분


예술이 그 풍토와 인간의 만남이라면 사쓰마 도예는 바로 일본이라는 환경과 조선 도공의 만남이었다. 심수관가의 의미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조선 도공이라고 해서 조선의 질그릇이나 백자를 굽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일본 도자기를 구웠던 게 아니다. 그들이 구운 것이 일본 도자기가 된 것이다. 그들이 걸어 들어간 곳은 새로운 창조의 세계였다.

그들은 그 땅에서 그곳의 그릇을 구워냈다. 그들이 있기에 사쓰마 도예라는 한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 가문의 도자기에 ‘한국적’이라는 수사를 붙이고 싶어하는 마음의 부질없음이 여기에 있다.

수장고에서 만나는 심수관가의 작품들. 그것이 산맥이라면 도공 14대 하나하나는 연산(連山)이다.

5대 심당길(沈當吉)이 남긴 초화문상감(草花文象嵌) 술병은 당시 그들이 가졌던 기(技)의 경지를 말해준다.

아무 것도 생략된 것이 없는데 무엇인가가 생략된 듯한 이 여유. 흑토(黑土)로 상감한 난초의 아름다움. 단정한 주둥이와 힘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품격 있는 어깨. 이 병에 담았던 술에서는 난초향이 풍겼으리라.

7대 심당수(沈當壽), 8대 심당원(沈當円)에게는 관세음상이 유난히 눈에 띈다. 7대의 관음은 20㎝남짓의 높이인데도 그 중후함이 놀랍다. 여기에 8대는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뒤를 잇는다. 정교하고 섬세한 세공과 조형성. 관음은 자애롭고…. 결코 도기(陶器)라고 믿을 수 없이, 상아를 깎은 듯한 소품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고통이 그들을 지나가고 있었던가. 저토록 많은 관음을 빚으며 기원했을 그들의 마음이 상아빛 따뜻함 속에서도 마음을 무겁게 한다.

12대 심수관의 만개(滿開)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분화(噴火)다. 그는 마침내 심수관가의 도예를 세계화시킨다.

관요 성격의 가마가 폐지되자 그는 사재를 털어 그것을 인수, 메이지 초기의 와중에서도 수출로 활로를 연 경영 감각의 소유자였다. 뿐만이 아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테크닉을 가졌던 그는 유수한 스태프를 모아 이끌어 가면서, 그 작품에 직인(職人)의 이름을 남기는 마음의 넓이를 또한 가졌던 도공이었다.

이 시기는 도공들에게도 변혁의 시대였다. 그때 12대가 착안한 것이 한국의 옹기 기법이었다.

일본에도 항아리는 있었다. 그러나 항아리로 상징되는 커다란 용기는 중국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생활용기로서만 만들어졌다. 12대 심수관은 이 생활용기에 섬세한 채색과 조각 기술을 접합시켜 예술품화했다. 1백50㎝가 넘는 화려의 극을 보여주는 대화병은 놀라운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12대가 이룩한 생활과 예술, 용(用)과 미(美)의 혼성찬가였다.

1867년의 파리, 1873년의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를 통해 그는 사쓰마 야키를 세계에 알렸고 유럽은 물론 미국 러시아 호주로 수출의 길을 튼다. ‘사쓰마 웨어’라는 상표의 탄생이었다. 생활용기의 크기로 거대한 화병을 만들자는 발상은 금기를 깨는 정신이었다.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두려운 것은 없었다. 자기가 세운 벽을 자기가 또 넘어서면서, 그들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일본 도예의 어머니인 조선, 그리고 아버지인 중국의 그것을 뛰어넘는 명예를 12대 심수관은 껴안게 된다. 세계 속의 사쓰마 야키라는 영광이었다.

13대 심수관에게는 일본이 침략전쟁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가던 광란의 시대에 사쓰마 도예를 지켜낸 고아(高雅)함이 있다. 공방을 지킬 젊은이도 없이 다 전장에 나가고 없던 시대, 도예품이 팔리기는커녕 위인의 동상까지도 떼어내 주물공장으로 넘겨 무기를 만들던 시대에, 교토(京都)대 출신의 엘리트가, 대숲을 스치고 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물레를 돌려 지켜낸 것은 도공의 길이었고, 심수관가 3백50년이었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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