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영석/다큐멘터리 제작의 윤리

  • 입력 1998년 6월 25일 19시 17분


얼마전에 있었던 KBS의 ‘일요스페셜―자연 다큐멘터리 수달’의 조작 파문은 방송사가 늦게나마 조작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일단락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처음에 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는 강력하게 부인하다가 여러가지 증거가 나오자 마지못해 시인하는 듯한 그간의 KBS의 태도는 뭔가 개운치 못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신정부의 출범과 함께 공영방송인 KBS는 그동안 한국방송의 고질이었던 시청률 위주의 방송 선정성을 과감히 탈피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었다.

▼ 「수달조작」에 배신감 ▼

세계의 대표적 공영방송인 영국의 BBC와 같이 질좋고 품격 있는 방송 내용으로 승부를 걸겠다며 방송 개혁의 구호를 외친 것이 바로 엊그제다.

그런 KBS에 의해 그것도 하필 가장 공영적인 간판 프로그램으로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아 왔던 ‘일요스페셜’에서 이러한 조작이 발생하였다는 점은 시청자들에게 매우 큰 충격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공영 방송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크게 실추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두말할 나위없이 다큐멘터리란 인위적이거나 가공적 사실이 아닌, 있는 현상 그 자체를 기록 형식으로 다루는 제작 기법이다. 그럼에도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가지 자료나 데이터 등을 첨가할 수도 있고 또 시청자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효과적인 음악이나 내레이션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작 과정에 불가피하게 인위적 연출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그 사실을 시청자들에게 반드시 알려주어야만 한다.

사실 이번의 조작 파문은 그 정도가 다른 때에 비해 좀 심했다는 것 뿐이지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있었다. 그리고 방송 제작자들의 윤리 의식이 우리보다 훨씬 강한 서구의 많은 나라들에서도 다큐멘터리 조작 문제는 가끔씩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가 유독 우리의 폐부를 찌르듯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찌들대로 찌든 대다수 시청자들의 주눅들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그들에게 또 다른 배신감과 패배 의식을 심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가둬 놓고 촬영을 했으면서도 마치 자연상태에서 한 것인양 거짓말을 했다.

또 그로 인해 그 동물들의 목숨까지 뺏었다 하니 의식있는 시청자들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구조조정이니 뭐니 하여 어느날 갑자기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한 두명이 아니다.

또 아직 자리에 붙어 있다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될지 늘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대다수 소시민들의 처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처한 대다수의 시청자들에게 우리 방송사들은 과연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이번 조작사태와 관련해 제기돼야 할 것이다.

처음 국제통화기금(IMF)위기가 시작될 때 만해도 방송사들은 소비지향적 드라마나 쇼의 편수를 줄이는 등 거품 제거를 위한 제스처를 보였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슬그머니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온 느낌이다.

사회의 모든 구석이 구조조정을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겪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텔레비전에 비쳐진 모습들은 너무 그대로 구태(舊態)에 젖어 있다. 10대 취향의 요란한 쇼나 사랑 타령의 비뚤어진 드라마, 그리고 어린 탤런트들이 나와서 이러쿵 저러쿵 신변 잡담이나 늘어놓는 소위 토크쇼 프로그램 등이 아직도 우리 방송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 방송도 구조조정 해야 ▼

공민영 가릴 것 없이 모두 돈 안들면서 만들기 쉬운, 그러면서도 시청률은 올릴 수 있는 프로그램 제작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빙산의 일각으로 나타난 것이 이번 다큐멘터리 조작 사건이다.

과거에 방송을 관장하던 공보처는 없어졌고 감독 기관인 방송위원회는 새로운 방송법의 표류와 함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무주공산(無主空山) 상태에 있는 방송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도 경제 구조조정 만큼 시급한 문제다.

김영석<연세대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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