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동우/『나라 망한 주제에…』

  • 입력 1997년 12월 11일 19시 59분


홍콩의 영국계 중학교에서 며칠전 한국학생과 홍콩학생 사이에 작은 패싸움이 벌어졌다. 한 홍콩학생이 우등생인 한국급우에게 『나라가 망했다는데 무슨 공부냐. 너희 나라에 돌아가 구두닦이나 해라』고 내뱉은 게 발단이 됐다. 화를 참지 못한 한국학생이 홍콩학생을 주먹으로 때렸고 이어 패싸움으로 번진 것. 다행히 한국학생이 먼저 주먹을 휘두른 것은 잘못이지만 그럴 만한 사유도 있었다고 인정돼 모두 「주의」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교민들은 『자녀들이 무슨 죄냐. 정부가 잘못해 어린 애들까지 외국에서 모욕을 당한다』며 비통해했다.지난 7일 홍콩의 한인 천주교회 및 개신교회의 주일미사와 예배는 눈물바람속에 진행됐다. 강론과 설교 및 기도는 모두 조국의 현실에 대한 걱정과 자성의 내용이었고 미사와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교민사회는 본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을 주고 받으면서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에 더욱 참담해 하고 있다. 이 참담함에는 「무능한 집권자와 무책임한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우리 모두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고 분수에 넘치게 살았다」는 후회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한국인은 본국으로부터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는 금융위기상황을 들으면서 얼굴조차 들지 못하는 꼴이 됐다. 허탈하다 못해 처참한 지경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11일 아침에 만난 한국계 은행의 한 지점장은 『우리는 지난날의 실수와 바보짓을 후회하는 지금 이순간에 또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며 『국제통화기금(IMF)에 대한 필요 이상의 적대감과 반발여론이 그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금은 IMF에 대한 비판보다는 우리의 정책을 믿고 우리를 계속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만들어야 할 때』라는 그의 진지한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정동우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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