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나』
40대 후반이나 50대 주부가 털어놓는 고민이 아니다. 최근엔 30대 초반에도 이런 하소연을 늘어놓는 전업주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결혼한 지 7년째인 전업주부 박모씨(33·서울 성북동)는 요즘 남편과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다. 남편과는 4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고 4, 6세된 두 딸도 있지만 남편만 보면 「인생을 헛사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낳자마자 직장을 그만 둔 이모씨(31·경기 의왕시 왕곡동)는 『아파트 13층에서 밤거리를 내려다 보다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내 자신에 깜짝깜짝 놀란다』며 『남편은 자기 생활이 있지만 「나는 뭔가」하는 회의가 든다』고 털어놨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초조함으로 늘 불안하다는 것.
중산층 이상의 생활수준과 대졸 이상의 학력을 지닌 주부들이 이런 괴로움을 토로하는 일이 적지 않다. 남편과 자녀의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쏟던 중년의 주부가 자녀가 곁을 떠나고 남편도 더이상 곁에 없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회의하는 「빈둥지 증후군」과는 다른 현상이다.
서울백제병원 신경정신과장 양창순박사는 『경쟁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주부가 받는 사회활동에 대한 압력이 이전 세대보다 훨씬 커졌다』며 『30대에 주부로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허탈감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사회학자들은 이들이 앞세대보다 빨리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를 사회적 상황에서 찾는다. 한국여성개발원의 변화순 연구부장(사회학)은 『이들은 대중화된 여성학교육을 받은 첫번째 세대로 주체에 대한 자의식에 일찍 눈을 떴다』며 『「내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세대』라고 설명했다.또 육아 등 가사활동의 부담이 사회로 많이 옮겨져 주부들이 옛날만큼 가사에 얽매이지 않아 자신을 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많아졌다는 것.
첫딸을 낳고 교육대학원에 진학,중학교 교사가 된 김미연씨(34·서울 홍은동)는 『결혼과 「나를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며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니 나의 생활은 물론 「나」 자체가 없어졌다』고 말했다.「나」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다시 직업을 찾았다는 것.
상명대 최연실교수(가족학)는 『30대가 겪는 정체성의 위기는 높은 자의식에 비해 전문화된 사회에 나가 일할 능력이나 여건을 갖추지 못한 현실에서 비롯됐다』며 『이들이 사회에 나가 일할 수 있도록 재교육하는 사회적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나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