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윤종구/상처뿐인 「시민정신」

  • 입력 1997년 9월 1일 20시 50분


개인택시 기사 이재화(李在華·58·서울 은평구 녹번동)씨는 요즘 아침마다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아파 일 나가기가 힘들다. 지난달 6일 경찰관을 매달고 달아나는 차량절도범을 격투끝에 붙잡는 과정에서 온몸에 멍이 들고 다쳤기 때문. 손님을 태우고 경기 안양시 석수검문소 앞을 지나다 흰색 그랜저 승용차가 검문 경관 2명을 문짝에 매달고 달아나는 모습을 우연히 본 것은 그날 오후 4시경. 이씨는 곧바로 그랜저를 추격했다. 매달린 경찰관을 도중에 뿌리친 그랜저는 뒤쫓는 이씨를 피해 8백여m나 내달리다 도로가 막히자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골목으로 달아나려 했다. 35년 택시경력의 이씨가 이를 놓칠리 없었다. 재빨리 그랜저 앞을 가로막았다. 범인은 이씨의 스텔라 택시를 이리저리 박으며 길을 뚫으려 했지만 이씨는 길을 내주지 않았다. 당황한 범인은 차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82년에도 뺑소니 음주운전자를 끝까지 쫓아가 붙잡은 공로로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은 이씨는 한참을 달려가 격렬한 몸싸움 끝에 35세의 범인을 붙잡았다. 그제서야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량이 도착했고 범인은 경찰에 넘겨졌다. 범인은 그날 오전 부산에서 차량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는 3주 진단을 받았지만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로는 3개월이 지나도 온전히 회복될 것 같지 않다. 조사받느라 안양경찰서에 몇번 불려 다니고 치료와 차량수리 때문에 일주일 넘게 일을 못한 이씨가 감수해야 할 유 무형의 손해는 말할 수 없을 정도. 그러나 이씨의 가슴을 더욱 멍들게 한 것은 「법규정」이다. 담당경찰관은 『훌륭한 일을 했지만 규정상 국가가 보상할 의무는 없으니 치료비는 책임보험에서 받고 차량수리비는 본인부담으로 하라』고 말할 뿐이라는 것. 『법이 그렇다는데 그런줄 알아야죠. 하지만 아들놈이 그래요. 몸 상하고 돈 잃는 시민정신, 앞으로는 뺑소니를 봐도 모른체 하라고요』 〈윤종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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