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숲속의 공주 잠 깨다」

  • 입력 1997년 7월 22일 08시 09분


숲속의 잠자는 공주는 왕자의 키스로 1백년간의 잠에서 깨어나 행복하게 살았다. 그림형제의 동화속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여기에선 다르다. 공주와 왕자, 마법과 해피엔딩의 스토리는 산산이 부서진다. 저자는 패러디 기법에 능통한 포스트모더니즘 글쓰기의 거장. 분홍빛으로 포장된 고전적 스토리를 한꺼풀 벗겨낸 뒤 그 속에 숨은 인간욕구를 변주곡을 연주하듯 다차원으로 그려낸다. 공주와 마귀할멈, 왕자의 시점을 오가는 여러편의 꿈은 끔찍하다. 왕자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으며 공주를 구하려는 이유는 오로지 「내 이름을 하늘에 쓰고 싶다」는 명예욕 때문이다. 공주는 왕자가 이미 당도하기도 전에 농부들에게 난행당하고 잠속에서 아이를 낳는다. 질투심 많은 왕자의 아내는 공주와 아이를 산 채로 요리해 왕자에게 먹이려 한다. 컬트영화처럼 기괴한 이 꿈들은 억압된 성욕과 자기과시욕, 현대인의 고독과 회의를 풍자한 것에 다름아니다. 왕자 덕분에 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두려움과 의심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묻는다. 『당신이 정말 나의 왕자님이에요?』 왕자 역시 『내가 성(城)을 잘못 찾은 것 같아』라고 고뇌한다. 첫 만남에서 이미 두사람은 『모든 것이 헛된 망상』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마법의 잠으로부터 끊임없이 깨어나는 것이 존재의 핵심인 공주. 그러나 꿈이 끝난 뒤 시작될 끔찍한 일상을 견딜 수 없어진 그는 간절히 소망한다. 「바라는 것은 오로지 다시 잠드는 것이다」 로버트 쿠버 지음(한밭·6,000원)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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