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에 이어 일문일답 형식으로 진행된 黃長燁(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비서의 기자회견은 인상적이다. 한때 북한의 권력서열 13위에까지 올랐고 주체사상을 정립한 이론가답게 그는 논리정연했다. 10년 전부터 앓고 있다는 만성후두염 때문에 다소 쉰 듯한 목소리였지만 육성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황씨가 밝힌 새로운 사실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내부와해공작을 꾸준히 추진하면서 무력통일을 기도하고 있는 북한의 대남(對南)기본전략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실감나게 증언했다. 특히 파멸의 궁지에 몰린 북한이 기습공격으로 서울을 5∼6분만에 잿더미로 만든 후 미군증원전에 부산까지 점령할 전쟁 시나리오를 짜갖고 있다는 경고는 가슴을 섬뜩하게 한다.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지금 대다수의 북한 주민이 기아에 신음하고 있는 것은 세계가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북한은 지난 3년 동안 金日成(김일성) 우상화사업에 무려 3억달러를 쏟아부었고 최근에는 김일성의 업적을 기려 「주체」연호를 제정하는가 하면 그의 생일인 4월15일을 「태양절」로 정했다. 정권 당 군은 물론 민족과 국가가 모두 「수령」의 소유물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북한의 참담한 현실이 전적으로 폭압적 정치체제와 범죄적 무력통일정책 그리고 반(反)인민적 지도사상에서 비롯됐다는 황씨의 지적은 옳다. 오죽하면 주체사상의 이론가인 그가 망명해서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고 전쟁위험을 경고하기에 이르렀겠는가. 우리는 북한의 실상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황씨의 망명이 위장이 아니며 주체사상에 대한 실패를 자인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더 이상 사상전향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관계당국의 말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와 관련해서는 신중히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씨가 조사과정에서 리스트를 별도로 제시한 것은 없지만 그가 오랫동안 북한 정권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대남공작 관련사항과 직접 접촉했던 국내외 인물들에 대해 진술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관계당국은 이를 대공수사활동의 연장선에서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철저히 조사해서 신속히 공개하고 의법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12월 대통령선거도 앞두고 있는만큼 이 사안이 정치적으로 악용돼서는 절대로 안된다. 아울러 정부는 황씨로부터 얻은 모든 정보를, 필요하다면 미국 등 우방과도 공유하면서 최대한 활용해서 전쟁억지와 북한개방유도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金正日(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지도층은 식량원조를 받으면서도 제국주의 타도와 붉은기 사수를 외치는 허장성세를 거두어야 한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전쟁도발책동은 중지하는 것이 옳다. 북한의 유일한 활로는 전쟁이 아니고 황씨의 주장대로 개혁과 개방이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