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옥의 세상읽기]『돈이 효자』

  • 입력 1997년 3월 29일 09시 02분


가끔 미국에 계신 친정 어머니와 전화를 한다. 볼티모어에 있는 노인 아파트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는 올해 여든이시다. 그래도 아직 얼마나 정정하신지 전화를 한참 하다보면 쨍쨍한 목소리 때문에 내 귀가 슬그머니 가려워질 정도다. 아들 하나에 딸 일곱을 낳으셨건만. 말년을 혼자 보내시는 노인네의 심정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불효막심한 내 자신을 탓해보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게 더 편하시다면서 절대 그런 마음 갖지 말라고 오히려 자식들을 위로하신다. 어머니는 요즘 미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하고 계신다. 그곳에 금쪽 같은 외아들을 비롯하여 두 딸이 살고 있지만 시민권을 따지 못하면 여러 가지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93년과 96년 두 차례 어머니를 뵈러 미국에 갔을 때, 어머니는 수첩에 커다랗게 영어 알파벳 대문자를 써서 외우고 다니셨다. 그리고 나더러 소문자를 써달라고 하셨는데 아에이오우 모음과 그 밖의 자음들이 어떻게 조합되어 소리를 내는지 나름대로 터득하시었다. 노 스모킹(No Smoking)을 비롯하여 당신 성함을 읽고 쓰시기도 했고 노인네답지 않은 정확한 발음으로 날 놀라게도 하셨다. 『얘, 책은 다 줄줄이 외우는데, 저 쪽에서 책에 없는 걸 물어보면 도대체 안들려. 그래서 한번 떨어졌잖니』 이렇게 웃으며 말씀하시는 목소리는 영락없이 삼십대 후반이시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계시니 치매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가지 걱정은 어머니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노인들에게 돈은 단 하나 남아있는 힘이다. 비록 쓰지 않고 고쟁이 주머니 속에 넣어 두더라도 1백달러짜리 한두 장 있으면 든든하신 게다. 『여자도 돈이 있어야 해. 사람 사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너도 돈 만들어 둬라』 줄곧 내 능력을 돈으로 연결시키는 어머니가 싫었지만, 살아갈수록 그 말씀이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 돈 안들여 자식 키운 부모가 어디 있을까. 자식이 사업한다면 집 팔아주고 공부한다고 논밭 팔아 자식들에게 다 빼주는 부모의 마음. 늙고 힘없는 부모가 계시다면, 주저없이 돈을 드릴 것. 그것이 한평생 속 썩이는 자식들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효도가 아닐까. 차명옥 (방송작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