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의 창/레바논 베이루트]사막-기름없는 중동의 파리

입력 1997-03-21 08:14수정 2009-09-27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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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국가라고 하면 흔히들 낙타 탄 유목민에 풀 한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 기름이 펑펑 쏟아지는 산유국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한때 중동의 화약고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레바논은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비산유국이다. 레바논에는 사막도 없다. 16년간 계속되던 내전의 상처가 시내 도처에 흉하게 남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흰눈 덮인 산봉우리를 뒤로 한채 꼬불꼬불한 길을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해안선이 손에 잡힐듯 다가온다. 한때 중동의 파리로 불릴만큼 명성을 얻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포탄을 맞아 반쯤 기울어진 빌딩들과 건물 곳곳에 패여 있는 총알자국만 아니라면 여기가 한때 동족상잔의 싸움터였던가 의아심이 들 정도다. 종교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은 1백80억달러(15조8천4백억원)에 이르는 물적손해를 안겼다. 더구나 인구의 7%에 해당하는 20만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30만명에다 이재민 90만명이라는 참담한 통계를 기록한 채 그나마도 외세의 압력에 굴복해 겨우 봉합됐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족 중 누군가는 죽거나 다쳐 맺힌 원한의 응어리가 풀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런데도 어제의 「원수」와 손잡고 가깝게는 쓰러진 가게를 다시 일으키고 크게는 국가재건의 손놀림으로 분주하다. 원수집단의 수장이 장관이 되고 한때 총칼을 겨누던 사이가 군막사내 동료가 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속도로가 새롭게 건설되고 항만이 확장되고 있다. 외국과의 교역량도 크게 늘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고 있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레바논의 저력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지중해 상권을 휘어잡았던 페니키아상인의 후예답게 실리적 입장으로 돌아선 것일까. 아마도 과거를 되씹기에는 어느새 빼앗기고 만 「중동의 금융 상업 교육 중심지」라는 화려했던 명성이 못내 아쉬웠던 것은 아닐까. 김규식(베이루트 무역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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