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홍의 세상읽기]「머리 모자란」 사람

  • 입력 1997년 2월 10일 20시 08분


머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빠졌을 뿐 문제될 것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기는 하지만 자랑스러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짓궂은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째 더 빠진 것 같애』하는 정도는 그래도 양반에 속한다. 『요즘 의학의 발달이 더딘가봐』라고 시작하여 『의사라도 자기 머리는 어떻게 못하나보지』라고 직격탄을 퍼붓기도 한다. 조금 심하면 『하긴 의사도 의사 나름일 테니까』라며 숫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그 뿐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머리가 나쁘다거나 머리가 조금 모자란다는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머리가 많이 모자라는 사람도 여기 있잖아』라며 교묘한 말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이쯤 당하다 보면 무언가 반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궁리 끝에 서양 속담을 인용하여 점잖은 응수를 하기로 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했어. 열심히 살면 나처럼 되게 되어 있어』 이런 말을 하면서도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형편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자네 목 위에 붙어 있는 게 돌이었다고. 몰랐었는데』 이렇게 나오니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언제인가 직장에서 작은 사건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공개해야 할지 숨겨야할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그때 내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던 아내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 머리를 길러야겠어』 『응,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데 왜』 『머리 길러 가지고 당신 가발 만들어 주려고』 그 순간 나는 감격에 겨워 고민하던 일도 다 잊어버렸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아내가 있다니.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이 아니었다면 나는 최소한 열흘은 감동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가발 만들어서 씌워 주었다가 당신이 나한테 잘못하면 사람들 있는데서 갑자기 벗겨 버리려고』 아니 이게 무슨 맥빠지는 소리. 『내가 대머리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그래봐야 똑같지 뭐』 『아닐걸. 다른 사람이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감추었던 것이 드러나면 창피할 걸』 그 말에 깨닫는 바가 있어 그사건을 공개하기로 했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도 새삼스레 들춰지면 부끄러운 법인데 감추었던 일이 드러나면 얼마나 창피하겠는가.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괘씸하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다. 조언을 해줄라치면 다른 예도 많을 텐데 하필 머리를 가지고…. 황 인 홍 <한림대교수·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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