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일가족 탈출 뒷얘기]매수된 사회안전부원 탈북 도와

  • 입력 1996년 12월 5일 14시 38분


북한 주민 金경호씨(62) 일가족 17명의 탈출사건은 체제회의와 신변위협등이 계기가 된 죽음을 각오한 탈출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탈출사건과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망명자 수가 일가족 17명에 이르는 대규모라는 점과 식량난등 체제유지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북한정권의 주민통제가 해이해지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는 사건으로 간주된다. 또 金씨의 부인 崔현실씨(57)가 재미교포 崔영도씨(79)의 딸로 밝혀졌고 탈출과정에서 재미교포 崔씨가 북한 사회안전부원까지 매수, 탈출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된 것도 흥미롭다. 재미교포들이 개입한 탈출은 趙창호 대위의 탈출에 이어 두번째로 북한 주민들의 탈출방법과 관련,주목할 대목이다. 이번에 일단 홍콩까지 탈출한 사람들은 金씨내외와 5자녀등 그 일가족 16명과 탈북을 도와준 사회안전부 안전원 崔영호씨등 총 17명으로 밝혀졌다. 구체적인 탈출동기 그리고 구체적인 행로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홍콩 이민국에서 金씨 가족들이 진술한 내용등을 종합할 때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金씨는 남한출신으로 6.25당시 인민군에 강제로 징집된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이민국에서 2명의 형과 여동생이 서울 이태원동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전쟁이 끝나자 金씨는 崔현실씨와 결혼했고 이후 평양에 거주했으나 남한 출신이라는 출신성분때문에 韓中 국경도시인 함경북도 회령시 산촌 농업지구로 추방돼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인민군 분대장 출신으로 알려진 아들 금철씨(36)등은 회령의 공업지구에 소속된 공장의 노동자로 일해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金씨 가족들은 일단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지로 추방된 데다가 식량난이 계속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탈출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94년7월 金日成사망당시 부인 崔씨가 아파 병석에 있다가 문병온 이웃주민앞에서 미소를 지었다가 `어버이 수령의 상중에 미소를 지었다'는 이유로 신고를 당해 심한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崔씨는 당시 돼지 한마리를 뇌물로 바치고 풀려났지만 이 사건후 탈출 결심을 더욱 확고히 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망명한 북한중앙방송 작가 장해성씨(50)가 북한에서는 금기사항인 金正日의 흉을 보다 국가안전보위부에 발각돼 체포위기를 맞자 탈출한 것과 비슷한 정황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탈출에는 재미교포 崔씨가 북한에 거주중인 딸 가족과의 접촉을 통해 탈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재미교포들의 경우 북한 가족과의 편지교환과 현금송금은 물론 왕래까지 자유스러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金씨 가족은 崔영도씨의 자금지원등을 받아 사회안전부원 崔영호씨를 매수해 탈북을 시도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후 金씨 가족은 崔씨의 안내를 받아 10월26일 새벽2시께 집을 나서 4시께 두만강변에 도착했고 북한 경비병의 감시를 피해 渡江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겨울철이라 강물이 줄어 탈출에는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곧 바로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길림성 龍井으로 이동,재미친족들이 채용한 중국 조선족의 안내를 받으며 홍콩으로의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龍井에서 瀋陽과 北京을 거친뒤 廣州와 深천(土+川)을 통해 11월24일 천신만고끝에 홍콩에 도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루트는 5월 망명한 北韓 과학원 음향기기연구소장 정갑렬씨(45)와 북한 중앙방송소속 방송작가 장氏등이 사용했던 루트로 알려졌는데 중국을 통해 망명한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이 루트를 이용하고 있다. 金씨 가족들은 일단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홍콩 이민국에 망명을 신청했고 이에따라 홍콩정청은 이들을 新界지역에 위치한 上水특별감호소에 수용, 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우리 총영사관측에 이같은 사실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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