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8)

  • 입력 1996년 10월 28일 20시 29분


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5〉 물은 알맞게 따뜻하다. 나는 욕조 안에 누워서 다리를 길게 뻗는다. 저절로 눈이 감긴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떠내서는 얼굴에 끼얹는다.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욕조 벽에 기댄다. 현석의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잘 그려지지 않는다. 장마가 시작되던 계절이었다. 그 밤 강가의 모텔에서 나를 안으며 그는 말했다. 우리의 첫날밤, 우리의 축제야. 돌아오는 길에 본 하늘은 귀퉁이에서부터 다시 서서히 먹구름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아이와 헤어졌고 바로 그날 그와도 헤어졌다. 헤어지던 날 그가 말했던가. 넌 한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어, 라고. 그는 커피도 마시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가 남긴 식은 커피를 마시며 나는 그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그에게 갖고 있는 사랑의 이미지를 지켜줄 것을 바랐다. 사랑에 환멸을 느껴버리면 다음 사랑을 할 의욕을 잃을 테니까. 『하지만…』 삶은 다채롭다. 그 속에서 환멸 정도는 사소한 일이다. 그가 돌아왔다면 나는 어쩌면 사랑이란, 사소한 장애쯤은 이겨낼 수 있는 지속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 생각이 옳았다. 사랑이란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지속적인 감정이라면 그가 나를 용서하는 데에 넉 달이나 걸렸을 리 없다. 나는 욕조에 몸을 더 깊숙이 눕힌다. 물을 발견하면 가볍게 손만 씻는 게 가장 좋다. 경우에 따라 옷을 벗고 몸을 담그게 되더라도 머리만은 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머리까지 물 속에 집어넣으면 숨막혀 죽고 만다. 사랑이란 미혹의 물에. 그를 다시 만난다 해도 나는 내 상처를 보이거나 위로를 구하진 않을 것이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이기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기심을 잃었기 때문에 성처받은 것뿐이다. 내 생각은 더 진전되지 않는다. 내가 없어지고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이 내 몸을 감싸서 어디론지 데려가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몸이 물 속에서 다 녹아버린 것인지 내 몸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다.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싶더니 나는 어느새 욕조 안에서 잠이 들어버린다.<글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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