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7)

입력 1996-10-27 20:34수정 2009-09-2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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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4〉 욕조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본다. 몹시 부석부석한 얼굴이다. 두 달쯤 전에 청탁받은 소논문 하나를 차일피일하다가 이틀 전에야 쓰기 시작해서 어젯밤을 새워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정오 무렵에 교정을 끝내고 학회보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상냥하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 토요일이 잖아요. 원고 갖고 나오셔도 저희들 퇴근한 뒤일 거예요. 월요일날 학교로 전화드릴 테니까 팩스나 컴퓨터 전송으로 보내 주세요』 그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들었다.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섹스에 대한 몽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껏 몰두해서 일하다가 드디어 그 일을 끝마치고 나면 으레 겪는 일이다. 그동안 묶였던 시간이 눈앞에 자유롭게 펼쳐지며 불현듯 이완된 기분에 빠지고 싶어진다. 그런 때는 대개 혼자 술을 마신다. 하지만 오늘처럼 섹스가 생각나는 때도 이따금 있다. 정신을 혹사하고 난 다음이라 특히 그런 것 같다. 육체에 마음껏 몰두함으로써 정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정신적인 존재임을 부정하여 정신을 쉬게 하려는 본능적인 신체조절인지도 모른다. 다른 운동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섹스쪽이 더 아쉽다. 혼자서 힘든 일을 마친 다음에는 타인이 그리운 법이니까. 그러나 섹스라는 멋진 운동은 파트너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제약이 있다. 그러기에 지극히 대중적인 운동이면서도 공개적으로 보급시킬 수는 없는 것이리라. 나는 이불 속에서 몇 번인가 이리저리 돌아누웠다. 자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본능적인 배설이 아니라 한몸이 되고자 하는 인간끼리의 다정함이었다. 결국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나는 스웨터를 걸쳐 입었다. 멀리 큰길까지 산책을 했다. 우체국 앞을 지나다보니 레깅스에 부츠를 신은 젊은 여자 하나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있었다. 긴 퍼머머리와 늘씬한 뒷모습. 애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애리의 편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글 :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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