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6)

  • 입력 1996년 10월 26일 20시 17분


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3〉 스스로 죄의식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왔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동생의 연적이 되어 상처를 주었다는 데에 나도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위선을 싫어했다. 애리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현석과 헤어지고, 그러고 나서 가슴 속에 이루지 못한 사랑의 그림자 따위를 지니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누구를 위해서 내 자신을 희생했다는 식의 착한 주인공 역할도 내 배역은 아니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죄를 지을 시간과, 그것을 뉘우칠 만한 시간이 아직 있었다. 그런 것이 바로 삶이라고 생각할 만한 위악도 있었다. 방학 때 서울에 다니러 온 애리는 내게 딸기향 샤워배스를 선물했다. 현석은 그 딸기향을 좋아했다.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면 코끝을 내 가슴에 문지르며 과자 냄새가 난다고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나는 그 딸기향 배스가 애리의 선물이라는 사실도 점점 잊어버렸다. 현석이 좋아하는 향이라는 생각만 남아 있었다. 애리의 편지를 읽고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그 딸기향 배스를 생각했다. 현석이 떠난 뒤 그것을 내다버렸다는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에 잠깐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렇게 벌떡 일어나서 해야 할 급한 일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불현듯 방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나는 그것이 현석임을 직감했다. 『잘 지냈어요?』 현석은 존대말을 쓴다. 『좀 만날 수 있을까요?』 그의 정중한 말씨에 나도 예의바르게 대답한다. 『그렇게 하죠. 어디가 좋을까요?』 내 목소리가 건조한 것은 애써 반가움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석이 사적인 감정이 아닌 어떤 종류의 공적인 용무로 전화를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여 기대를 갖지 않으려는 장치이기도 하다. …왜 이 두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걸까.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허겁지겁 옷을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간다. 약속시간까지는 두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글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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