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우가 만난 사람] 최희암 사장 “연대면 어떻고 고대면 어때…학연·지연 따지는 게 바보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10월 17일 05시 45분


농구를 떠났지만 잊은 적은 없다. 농구 감독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성공리에 개척한 고려용접봉 최희암 사장은 최근 7년을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다. 파격적 인사와 거침없는 행보로 눈길을 끈 연세대 감독 시절처럼 지금도 지연, 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로 인정받고 있다. 사진제공|최희암 사장
농구를 떠났지만 잊은 적은 없다. 농구 감독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성공리에 개척한 고려용접봉 최희암 사장은 최근 7년을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다. 파격적 인사와 거침없는 행보로 눈길을 끈 연세대 감독 시절처럼 지금도 지연, 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로 인정받고 있다. 사진제공|최희암 사장
■ 최 희 암 전 연세대·전자랜드 감독-현 고려용접봉 사장

감독 시절 파격 인사…회사도 마찬가지
개인적 능력보다 회사에 득 되는 게 우선
혹독한 훈련? 이상민·김재훈 잘 견뎠지
많이 져보기도 해야…프로 땐 성급했어
후배 감독들 ‘과거의 나’는 빨리 잊어야


2009년 10월의 어느 밤, 초로의 신사는 인천의 삼산체육관에서 오랜 시간 정든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의 악수를 나눴다. 물설고 낯선 중국 동북부의 다롄이 그의 행선지였다. 담담한 표정의 그와 달리, 떠나보내는 이들의 마음이 더 착잡한 듯했다. 40년 넘게 농구 한 길만을 걸어온 그가 전혀 다른 삶의 행로로 들어서기 때문이었다. 고려용접봉 중국다롄법인장, 그의 새로운 직함이었다.

농구가 1990년대 국내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한국농구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지도자, 뿔테안경 너머로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뿜던 감독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홍봉철 전자랜드 구단주의 친형인 홍민철 고려용접봉 회장의 과감한 발탁인사였다.

7년이 흐른 지금, 그는 성공한 경영인이 됐다. 중국에서의 착실한 실적을 인정받아 2년 전 국내영업총괄사장으로 승진했다. 경남 창원의 2만평 대지에 280여명의 직원이 일하는 공장과 서울의 본사를 일주일에 2∼3차례 오가며, 연간 매출 3500억원의 강소기업을 이끌고 있는 최희암(61) 사장이다.

인생의 전부였던 농구를 떠나있는 지금 그는 행복할까. 인터뷰를 앞두고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다. 그러나 “회사 일이 바빠 농구경기를 볼 틈은 없다”는 그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 순간, 그 같은 의문은 사라졌다. “감독이든, 사장이든 호칭에 개의치 않는다”고 한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첨단 용접봉과 회사에 대해 소개하는 동안 줄곧 미소를 머금었다. 지난 7년의 세월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농구 인기가 한창일 때 최고 인기팀 감독이었다. 지금의 한국농구를 보면 어떤가.

“많이 침체돼 있어 안타깝다. 뭔가 계기가 마련돼야 할 듯한데 쉽지 않아 보이고…. 국제경기 성적도 좀 좋아야 하고, 행정력도 뒷받침돼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물론 훌륭한 선배들이 (농구)행정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50대를 비롯해 좀더 젊은 사람들이 하면 좋겠다. 제조업에서도 마케팅은 젊은 친구들이 맡듯이, 농구를 좋아하는 타깃 계층을 확실히 설정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농구 시즌에도 야구가 스포츠신문의 주요 지면을 장식하는데, 신문사를 탓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농구인들 스스로 분발해야 한다. 주변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최 사장은 1990년대 연세대 농구부 감독으로 농구대잔치에서 3차례 우승했다. 당시 연세대 농구부의 인기는 마치 지금의 아이돌 그룹을 능가할 정도였다. 수많은 소녀들이 연세대 농구부의 합숙소 앞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연세대를 포함한 대학농구의 엄청난 인기는 1997년 프로농구 출범의 모태가 됐다.

-선수 시절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않아 감독으로 인정받기까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대학에 있을 때의 판단은 결국 스카우트인데, (한 선수가 뛸 수 있는 기간이) 4년이지 않나. 짧은 기간에 성적을 내려면 우선 좋은 선수를 뽑아야 한다. (성적의) 70∼80%는 거기서 결정 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듯이, 그 선수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가 나머지 20∼30%를 좌우한다. (선수)관리와 훈련이 중요하다. 머리를 써야 하는 훈련일 때는 채찍질이 필요 없다. 공포감을 주면 오히려 판단을 못하고 바보가 된다. 자꾸 ‘왜’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선수구성부터 관리까지 나름의 원칙에 입각했다.”

감독 시절 최희암. 사진제공|KBL
감독 시절 최희암. 사진제공|KBL

-선한 인상과 달리 연세대 감독 시절 훈련을 엄청 혹독하게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선수들이 숙소에서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던데 어느 정도였나. 그리고 누가 가장 잘 버텼나.

“이상민(현 삼성 감독)이나 김재훈(현 모비스 코치)이 잘 견뎠다. 전자랜드 감독을 하는 유도훈도 잘 따랐다. 그 친구들도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나머지 선수들은 말 안하겠다(웃음). 또 (서)장훈이는 머리로 이해를 시키면 누구보다 잘 따랐다. 오히려 편했다.”

최 사장은 최근 ‘예능인’으로 더 익숙한 서장훈에 대해 “처음에는 왜 농구를 떠나 엉뚱한 일을 하고 있나”라며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끔 통화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한다.

-연세대 감독 시절(1993년) 고려대 출신 이우재(85) 선생을 코치로 영입하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안팎으로 반발이 무척 심했다. 고려용접봉 사장으로서도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변함이 없나.

“(학연·지연을 따지면) 바보다. 연대면 어떻고, 고대면 어떤가. 오히려 이 선생님이 지도하면 우리 선수들이 좀더 집중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아무리 가정교육을 잘 시켜도 학교 선생님이 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아버지가 말한 내용을 선생님도 강조하면 ‘역시 아버지 말씀이 맞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선수들은 개인플레이를 잘했는데, 이 선생님은 팀플레이를 강조하셨다. 사실 누가 팀플레이를 모르겠나. 이 선생님은 ‘볼을 4번은 돌려라’라고 가르치셨다. 볼 4번 돌리기는 쉽고 단순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노마크 찬스가 나고 슛을 하면 성공한다. 개인플레이를 줄이고 팀플레이를 펼친 덕분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회사생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 능력이 중요하지만, 결국은 회사에 득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최 사장은 모비스 지휘봉을 잡았던 2003년에도 이우재 선생을 코치로 ‘모시는’ 파격을 보였다)”

-이우재 선생의 사례처럼 거꾸로 농구 후배들이 지도자로 복귀할 길을 만들어주면 응할 수 있나.

“이제 안 된다. 나이도 있고, 농구를 떠나 중국에도 가 있었고…. 일선으로 복귀할 수는 없고, 1년에 한두 번 정도 원포인트 레슨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최 사장은 가끔 특수관계인 전자랜드의 창원 원정경기 때 농구장을 찾곤 한다. 그러나 멀리서 말없이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프로에서 성과가 미약했기에 농구계 복귀에 미련이 남아있을 듯도 하다.

“사실 프로에 와서는 너무 급했다. 단기간의 성과에 치중하다보니 그랬다. 장기적 기획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성과가 안 나다보니) 스스로 실망했고, 모비스에선 스스로 물러났다. (대학 감독 시절) 많이 질 줄도 알아야 했는데, 그런 훈련이 부족했다. 그래서 (프로에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다.”

대학농구 최고의 지도자였던 그의 프로행은 시간문제처럼 여겨졌고, 막상 현실이 되자 모든 이가 주목했다. 그러나 모비스에선 2시즌을 채우지 못했고, 전자랜드에선 3시즌을 보낸 뒤 농구계와 완전히 작별했다. 프로에선 정규리그 승률이 채 5할에 미치지 못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챔피언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그가 프로로 옮긴 시기가 적절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2000년대 초반 프로농구는 이미 아마추어농구와는 다른 나름의 기반과 틀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고려용접봉 최희암 사장. 사진제공|최희암 사장
고려용접봉 최희암 사장. 사진제공|최희암 사장

-대학 시절 지도했던 후배들, 제자들이 지금은 대거 프로 감독이 돼 있다. 이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나. 그리고 지도자 선배로서 조언을 해준다면.

“유명한 선수 출신이라면 과거의 나를 빨리 버리고 잊어야 한다. 선수 때는 못해도 부모님이, 감독과 코치가, 학교가 커버해준다. 하지만 감독이 돼서 성적이 나지 않으면 누구도 도와주지 못한다. 이전에는 보호막이 있었지만, 감독은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 대학시절 스타선수는 감독도 자기 때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 착각이다. 유명한 선수 출신 감독은 패스 미스도, 슛 실패도 이해를 못한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 감독과 선수 사이에 불신과 갭이 생긴다. 또 프로는 감독이 원하는 대로 100% 선수구성을 할 수 없다. 그에 따른 여러 대책을 세워둬야 한다. 그리고 감독이라면 100% 농구에 집중해야 한다. 대개 프로에선 바쁘다는 이유로 경기 분석을 분석관에게 맡기는데,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감독이라는 직업관에 투철해야 한다.”

-농구 감독과 회사 사장 사이에 공통점은 있나. 또 가장 보람되게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가.

“일이란 것은 결국 사람이 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직접 할 수 없을 때는 중간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 만큼 코치나 중간관리자가 맡아줘야 하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직업이지만, 나름대로 성취욕도 있어야 하고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취를 강조하는데 의외로 직원들이 잘 따라준다. 지금 (경제상황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현상유지 이상으로 회사가 나아가고 있으니 보람을 느낀다.”

최 사장은 처음 중국에서 지내던 때를 회상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부분은 역시 “말과 글자”였다. 같은 중국어라도 베이징과 광저우의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말이 천양지차였고, ‘간체’로 상징되는 현대 중국의 한자는 우리나라에서 접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다행히 중국까지 동행해준 부인 덕분에 무난히 적응할 수 있었고, ‘농구를 잊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각오로 새로운 일에 매달린 까닭에 6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쩌면 프로에서의 실패가 그를 단련시키고 오늘을 일구게 만든 초석이었는지 모른다.

최희암 사장

▲생년월일=1955년 12월 24일(전북 무주 출생)
▲출신교=휘문고∼연세대
▲실업농구선수 경력=현대전자(1977∼1982년)
▲농구지도자 경력=연세대 감독(1986∼2002년), 동국대 감독(2005∼2006년), 모비스 감독(2002년 4월∼2003년 12월), 전자랜드 감독(2006년 5월∼2009년 4월)
▲주요 성적=농구대잔치 우승 3회(1993∼1994·1996∼1997·1997∼1998시즌), 프로통산 정규리그 110승124패·플레이오프 2승5패
▲경영활동 경력=고려용접봉 중국 다롄법인장(2009년 10월∼2014년 5월), 국내영업총괄사장(2014년 5월∼현재)

정재우 스포츠1부장 ja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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