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피플] 두산 고졸 루키 정수빈

  • 입력 2009년 5월 29일 08시 26분


두산의 고졸신인 정수빈(19)은 175cm, 70kg의 작은 체구에 ‘두산 어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소년 같은 외모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는 김경문 감독의 표현처럼 ‘독종’이다. 4월에 이은 5월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 SK와의 3연전에서 연이틀 홈런포를 쏘아올리며 그 면모를 톡톡히 과시했다. 그라운드 뒤에서는 말수 적고 수줍음 많은 ‘소년’, 타석에 들어서면 베테랑 못지않은 두둑한 배짱의 ‘싸움닭’. 상대팀 선수들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아기곰’ 정수빈을 만났다.

○10세 소년, 단식투쟁하며 야구 시작

“야구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성적 중간, 성격 무난. 지극히 평범했던 10세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건 담임선생님의 이 한마디였다. 평소 운동을 좋아했던 정수빈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들었고 방과 후 치러진 테스트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그의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수원 신곡초등학교 야구부 이재준 감독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반대. 무슨 일이 있어도 야구가 하고 싶었던 ‘수빈 어린이’는 그때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요. 한달 동안 밥도 안 먹고 밤낮으로 떼를 썼대요. 그냥 (야구가)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수빈은 야구를 하기 위해 병점초등학교에서 신곡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초등학교 야구부가 그렇듯 방과 후 특별활동 수준이었지만 정수빈에게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야구를 시작한지 2년 만에 ‘프로팀 입단’이라는 꿈을 가슴 속에 품었다.

세월이 흘러 고교에 진학한 정수빈은 팀의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포지션은 투수와 외야수. 빠른 발을 활용한 주루플레이와 상대투수의 수를 읽는 능력은 당시에도 ‘프로선수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교대회에서 번번이 예선 탈락했던 유신고의 정수빈이 청소년대표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정수근 선배는 내 삼촌

지난해 열린 제23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는 정수빈에게 절호의 찬스였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인 터라 팀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자극이 됐다. 올 시즌 함께 프로 신고식을 치른 삼성 김상수, KIA 안치홍 등이 당시 멤버이자 라이벌. 그때부터 스타플레이어였던 김상수에 비해 정수빈은 무명에 가까웠지만 악바리 근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일례로 미국과의 결승전을 앞두고 정수빈은 왼쪽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귀국하자마자 수술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지만 행여 엔트리에서 빠질까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방망이조차 들기 힘든 손으로 그라운드에 섰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독종.”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스태프는 정수빈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의 남다른 근성은 김경문 감독에게서도 합격점을 받았다. 올해 스프링캠프에서 김 감독은 과거 두산의 톱타자 정수근을 연상시키는 정수빈을 주목했다.

“저 사실 어릴 때부터 친구들한테 정수근 선배님이 제 삼촌이라고 하고 다녔어요. 하하. 야구하는 것도 그렇고 이름도 비슷하니까 친구들이 믿더라고요.”

○연 이틀 홈런으로 비룡 울리다

정수빈은 청소년대표팀을 거쳐 2009년 신인 드래프트 2차 5번(전체 39순위)으로 두산에 입단했다. 기량에 비해 썩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두산 스카우트팀 이복근 차장은 “실력은 다른 신인선수들보다 뛰어났지만 작은 체구 때문에 (순위가) 밀리게 됐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영리한 선수’라고 덧붙였다. 영리함, 정수빈에게 빠질 수 없는 또 다른 수식어다.

“제가 타석에 들어서면 외야수들이 앞으로 나와요. 힘이 없어 보이니까 장타를 못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게 제 콤플렉스였어요. 어떻게 하면 야수 키를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배팅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정수빈의 타율은 27일까지 0.286이지만 장타율은 무려 0.536이다. 김현수-김동주-최준석의 두산 클린업트리오와 맞먹는 수치. 남들보다 늘 2시간 먼저 나와 연습하고 매 경기 집중해서 얻은 결과다.

정수빈의 노력은 22-24일 SK와의 문학 3연전에서 빛을 발했다. 22일 경기에서 그는 프로 데뷔 첫 홈런을 쏘아올리며 팀에 승리를 안겼다. “넘어갈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는 게 정수빈의 솔직한 소감. 일단 맞았으니 3루까지 무조건 뛰고 보자는 심정이었단다. “2루를 밟고 좌익수를 봤는데 움직이질 않더라고요. 그때 넘어갔다는 걸 알았어요.”

23일 타석에 들어선 정수빈은 전날의 영광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6회 1-1 동점에서 결승 우월솔로홈런을 터트렸다. “두 번째는 넘어간 줄 알았는데요. 페어냐, 파울이냐 그걸로 순간 고민했어요.”

고교시절 기록한 홈런 4개 중 그라운드홈런만 2개인 것을 고려하면 연 이틀 홈런은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기록이다. “안 믿기죠. 사실 지금도 얼떨떨해요.”

○목표는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는 것

정수빈에게 SK전 이후 달라진 점을 물었다. 딱히 없다고 했다. 단지 “프로팀에 오니 경기장 나설 때 팬들이 알아봐주고 사인해달라고 하는 게 낯설다”며 얼굴을 붉혔다. 이럴 땐 영락없는 고등학생.

힘든 점을 묻자 역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굳이 꼽으라면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출퇴근(?) 길 정도다. 하지만 그 정도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프로팀에서, 그것도 1군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매일매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특히 부모님이 좋아하는 모습에 힘을 얻는다.

“가끔 운동하다가 순간적으로 하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있는데요.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평생 야구만 하면서 살고 싶어요.”

정수빈의 목표 역시 ‘신인왕’이나 ‘몇 할 타자’가 아니다. 현재는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이고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선수’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이라며 수줍게 웃은 정수빈은 꾸벅 인사를 건넨 뒤 종종 걸음으로 실내훈련장으로 향했다.

잠실 |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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