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잖아, 영란이 순영이 성옥이…”생애최고 작전타임

  • 입력 2008년 8월 25일 03시 00분


승리 확정적인 후반 1분도 안남기고 이례적 “타임”

임영철 감독, 노장들 이름 일일이 부르며 교체투입

“좋은날 왜이리 눈물이 나는지…” 경기장 울음바다

모친 위독해 급거 귀국한 임감독 “이제 감독 그만하고 싶다”

■ 女핸드볼 감동의 동메달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 임영철(48) 감독은 끝까지 선수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채 거구의 외국 선수들과의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허순영, 35세의 늦은 나이에 어렵게 출산해 집에 두고 온 21개월 된 딸이 방송에서 엄마를 보자 TV를 껴안았다는 말에 가슴 아파하던 오영란, 대표팀이 불렀을 때 너무 나이가 많다며 고민하다 마지막 봉사를 위해 참가한 오성옥….

‘독사’라는 별명을 들으면서까지 30대 아줌마들을 심하게 다그치며 악명 높은 지옥훈련을 이끌어왔던 지난날들, 선수가 부족해 대표팀 구성에 애를 태웠던 날들…. 소속팀 해체로 실업 위기에 몰린 선수들을 데리고 중학교 체육관을 전전하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올림픽 무대의 마지막 날 그는 선수들 곁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24일 오전 먼저 귀국했다. 올림픽에 참가하기 2주 전 임 감독은 부친상을 당했다.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는 강인한 모습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쓰러지셨다. 임 감독의 부친이 사망하자 어머니도 슬픔을 못 이겨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고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임 감독은 어머니를 보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선수들은 이런 그의 마음을 알고도 남았다.

한국과 헝가리의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이 열린 23일 중국 베이징 국가체육관.

한국이 33-28로 크게 앞서고 있던 종료 1분 전. 임 감독은 마지막 작전타임을 요청했다.

큰 점수 차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의 타임 요청은 의외였다. 그리고 선수 교체를 지시했다.

“마지막 경기야. 이해해 줘야 해. 마지막 선배들이야.” 그러면서 임 감독은 선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오)영란이, (허)순영이, (오)성옥이, (박)정희, (홍)정호, 그리고 일곱 명이잖아. (문)필희, (안)정화 들어가.” 36세, 34세, 33세…. 마지막 올림픽이 될 30대 아줌마들이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최고참 오성옥이 말했다. “감독님 안 그러셔도 돼요.” 그러나 임 감독은 후배들의 눈을 보며 설득했다.

감독의 뜻이 전해지자 이번 올림픽이 마지막 무대가 될 선수들도 울고,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울었다. 경기장 안팎이 모두 눈물바다가 됐다.

마지막 1분을 마친 한국 선수단은 결국 33-28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발목에 허리에 부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진통제를 맞으면서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은 코트에서 어깨를 겯고 강강술래 세리머니를 펼치다 임 감독을 헹가래쳤다.

경기장을 빠져나오며 대성통곡을 했다. 평소 누구 못지않게 꿋꿋하던 오영란은 제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서럽게 울었다. 문필희는 “좋은 날인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섯 번째 올림픽에 출전해 금 1개, 은 2개, 동메달 1개를 딴 오성옥은 “이제 대표팀에서는 은퇴한다. 소속팀인 오스트리아 히포방크와는 1년 계약이 남았다”며 “가정으로 돌아가 엄마로서 못다 한 사랑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나이가 많지만 자연스레 은퇴할 시기를 기다리겠다”는 오영란은 “딸에게 금메달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나 값진 동메달이다. 내 딸이 이 동메달을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사실 올림픽이 끝나면 우리는 잊혀지고는 했다. 몸에 와 닿는 현실적 도움은 별로 없었다. 정부가 도와줬으면 좋겠다”며 “후배들도 자신감을 갖고 한국 여자핸드볼의 업적을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경기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모든 대회가 끝나면 허무하다. 이것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고 혹독한 언어를 써 가면서 했다. 끝나면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허무에 빠진다. 이제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동메달에 그쳤지만 국민은 그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누리꾼들은 핸드볼 경기의 ‘마지막 1분’을 편집해 돌려보며 격려를 보내고 있다. 직장인 황국진(27) 씨는 “비인기 종목의 설움 속에서도 항상 메달을 일궈냈던 선수들이 코트로 들어서는 순간 울컥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러 꺾고 우승

결승전에서는 한국과 준결승에서 판정 시비를 일으켰던 노르웨이가 러시아를 34-27로 이겼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실제 주인공들인 여자핸드볼 대표팀 선수들. 4년 뒤를 기약하는 그들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베이징=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영상취재 : 사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영상취재 : 베이징=동아일보 황태훈 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