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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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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끈 한화 김인식(60·사진) 감독. 믿음의 야구, 휴먼 야구, 인화의 야구 등으로 불리는 그의 지도 철학은 쉽게 말해 ‘인간적’이다.
● “나한테 용돈 달라고 어리광 부리더군, 허허”
미국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인 22일 대전구장에 도착한 그는 언론의 뜨거운 취재 열기에 ‘왜들 이 난리인가’ 하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어느 스포츠든 감독이라는 자리가 그렇잖아. 잘하면 박수 받지만 못하면 한없이 떨어지지. 나도 사실 우리 선수들이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 체면치레하려면 아시아 예선은 통과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본과 미국까지 제칠 줄은 몰랐지.”
그러면서 김 감독은 공을 주위에 돌렸다.
“선수들이 정말 잘해줬어. 코치들도 좋았고 전력분석도 참 잘됐지.”
김 감독은 코치들과 척척 호흡이 맞았다고 했다. 스무 번 이상의 투수 교체를 하면서 투수 코치였던 선동렬 삼성 감독과 의견이 달랐던 것은 두 번 정도였다는 것.
억대 스타가 총동원됐지만 팀 분위기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이)승엽이가 나한테 ‘용돈이 떨어져서 그러는데 감독님, 용돈 좀 주세요’ 이래. (박)찬호는 한 술 더 떠. ‘감독님, 용돈은 (이승엽이 아니라) 제가 받아야 됩니다’ 이러는 거야. 자기가 더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거지.”
“선수들과 너무 격의 없이 지내는 게 아니냐”고 하자 “만만하게 보이면 어때. 이기기만 해 주면, 허허”라는 말이 돌아왔다.
● “처음엔 해외파 걱정 많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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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김 감독도 사실 해외파와 국내파 선수가 서로 잘 어울릴까 걱정은 했다고 털어놓았다.
“주위에서 워낙 뭐라 하니까 덩달아 걱정이 되더라고. 그런데 해외파 선수들이 인간관계에 더 적극적인 거야. 자기네 팀에서야 서로 농담하는 분위기는 아니잖아. 외로웠던 거겠지. 모처럼 선후배끼리 만나서 형, 동생 하니 너무 좋았던 거야.”
지난해 김 감독은 꼴찌 후보 한화를 포스트시즌까지 진출시키면서 유명세를 탔다. 한화의 돌풍 주역은 지연규(38) 김인철(35) 조원우(35) ‘풍운아’ 조성민(33) 등 부상이나 나이로 선수 생명이 다 됐다는 평을 받던 선수들이어서 김 감독의 역량은 더욱 빛났다.
김 감독은 “특별한 비결은 없다”고 했다.
“게네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죽기 살기로 했을 거 아냐.”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의 능력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하다. 김 감독은 1965년 실업 최강 한일은행에 입단해 최우수 신인상을 탈 만큼 좋은 투수였지만 어깨 부상으로 일찍 선수 생활을 접었다.
“입단 뒤 3년 정도 엄청 던졌지. 아침에 숟가락을 못 들 정도인데 또 등판을 해야 하는 거야. 당시는 그랬지. 그러다 어깨가 망가졌어. 그래서 나는 선수들에게 절대 무리하게 안 시켜.”
● 프로야구 떠나면 유소년 키워보고 싶어
김 감독은 2004년 12월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에는 자신의 재활에도 매달렸다. 즐기던 술 담배를 끊고 하루 6시간씩 고된 회복 훈련을 했다. ‘재활의 신’이라는 찬사는 여기서 나왔다.
“대표팀 감독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못 박은 김 감독은 “현장을 떠나면 유소년들을 키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대전=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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