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프로야구/마니아칼럼]찬호, 1년만에 '부활투' 쏘다

  • 입력 2004년 4월 17일 15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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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속의 단비가 4월 한반도 대지를 촉촉히 적셨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의 주말 오후, '코리언 특급' 박찬호가 국내팬들에게 푸짐한 선물 꾸러미를 풀어놨다. 오클랜드전과 애너하임전에서 2패만 기록하며 실망스런 '부활 퍼포먼스(Performance)'만 보여줬던 박찬호가 무엇보다 소중한 마수걸이 첫 승을 드디어 따냈다.

17일(이하 한국시간) 시애틀의 홈구장 세이프코 필드에서 열린 대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시즌 3번째 선발 등판한 박찬호는 최고 구속 95마일의 포심과 파워 커브를 앞세워 스즈키 이치로를 앞세운 시애틀 타선을 7이닝 무실점의 깔끔한 투구로 시즌 첫 승을 따냈다. 박찬호는 시즌 첫 잔치상에 삼진 5개를 곁들이면서 그렇게 목말라하던 시즌 첫 승을 거둔 것.

작년 4월 12일 시애틀 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1년 만에 다시 세이프코 필드에서 시애틀을 상대로 소중한 승리를 거뒀다. 평균자책(방어율)도 3.92로 낮아졌고 투구수 105개 가운데 62개를 기록할 정도로 제구력도 이상적이었다. 박찬호에게 있어 세이프코 필드는 '기회의 땅'인가.

초반 승부 - 텍사스타선 '영 파워'의 우세

주포 마크 텍세이라가 DL 명단에 올라 텍사스 타선의 누수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기 초반 내심 걱정을 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텍사스 타선은 투수지향 구장으로 소문난 세이프코 필드가 마치 알링턴 파크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파워 배팅을 구사했다.

1회 초 1사 후 행크 블레이락이 시애틀 선발 길 메시로부터 라이트 펜스를 넘기는 솔로포로 시애틀 덕아웃에 먹구름을 몰고 온 텍사스 영 히터들은 2회 초에도 불씨를 꺼트리지 않았다. 선두타자 데이빗 델루치가 우전안타로 출루한 뒤, 1사 상황에서 등장한 8번타자 랜스 닉스가 메시의 낮은 직구를 어퍼컷(Uppercut)으로 걷어올려 센터 펜스를 넘기는 투런 홈런을 뽑아냈다. 스코어는 3-0.

이날 경기에 있어 승패의 관건은 바로 3-0으로 앞선 아후 상황에서의 텍사스 타격 패턴이다. 만약 스코어가 3-0에서 그쳤다면, 박찬호는 마운드에서 여유를 가지기는 힘든 상황. 지난 애너하임전에서 1회 말 1점을 선취한 상황에서 무사 2루의 추가득점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역전패했던 상황을 기억하는가.

텍사스 타선은 홈런포가 터진 후 더욱 높아진 집중력을 보이며 포수 제랄드 레이어드(안타)-블레이락(1타점 2루타)-알폰소 소리아노(1타점 적시타)로 추가 2득점, 박찬호의 어깨를 한층 가볍게 만들어줬다. 팀웍이 무엇보다 중요한 야구경기에서 텍사스 타선은 팀웍이 '뭔지', 그리고 '어느 순간' 보여줘야 하는지 세이프코 필드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빅카드 'in 매치'- 이치로 vs 박찬호, 4타수 무안타

경기 전날까지 박찬호와의 통산 대결에서 11타수 3안타 타율 .278를 기록한 이치로는 박찬호에겐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일본의 자존심 '야구천재' 스즈키 이치로와의 대결은 박찬호 자신의 개인적인 승리와는 무관하게 국내팬들에겐 최고의 빅카드가 아닐 수 없다.

박찬호는 1회 말 시애틀의 리드오프(Lead-off) 이치로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낸 데 이어 3회 말 두번째 맞대결에서는 몸쪽 라이징 패스트볼로 포수 파울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했다. 4회 세번째 타석에서 1루수 땅볼로 잡아낸 박찬호는 파이널 매치인 7회 말에도 이치로를 유격수 땅볼로 잡아내 '사무라이 검객' 이치로의 날카로운 검날을 완전 고철로 만들어버렸다.

'타격 천재' 이치로는 박찬호와의 맞대결에서 4타수 무안타로 완패, 통산 맞대결 타율이 .200으로 떨어져 타격천재라는 찬사가 무색해질 지경. 박찬호가 이치로의 족공을 봉쇄한 게 시애틀전을 쉽게 풀어나가게 된 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박찬호를 상대했던 이치로는 말 그대로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다.

'한강(박찬호)'에서 뺨맞은 이치로는 수비에서 '낙동강(허버트 페리)'에게 분풀이했다. 이치로는 5회 초 페리가 친 펜스를 넘어가는 타구를 점프, 걷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공이 글러브에서 튕기는 바람에 2루타를 허용했다.

이치로도 아쉽지만 더욱 아쉬운 건 홈런을 도둑 맞은 페리다. 공격에서 박찬호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이치로. 하지만, 페리의 홈런성 타구를 막아내는 등 수비에서는 세 차례 진기명기급의 호수비를 선보였지만 타석에서의 완패를 가리기엔 역부족.

'95마일' 광속구 부활

3회 말 1사 1루 상황에서 에드가 마르티네스를 상대로 볼 카운트 1-1 상황에서 던진 포심 패스트볼이 95마일(약 153km)를 기록할 정도로 포심 패스트볼의 위력이 서서히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은 상당히 고무적인 부분이다. 박찬호는 이어 파워 커브로 마르티네스를 스탠딩 삼진으로 솎아내, 다저스 전성기 시절의 '팩' 박찬호를 연상케 했다.

3회 존 올러루드의 볼넷과 브렛 분의 안타로 1사 1.2루의 위기를 맞은 박찬호는 후속타자 라울 이바네스와 리치 오릴리아를 각각 우익수 플라이와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내 경기 초반 최대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만약, 박찬호의 볼끝이 조금만 무디었더라면 이바네스와 오릴리아의 타구는 펜스를 넘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바로 박찬호의 무브먼트가 차츰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물론, 리그 평균 10% 정도 홈런이 적게 나오는 세이프코 필드의 광활한 외야 덕을 본 것도 일 부분 사실이다.

박찬호는 6회까지 94마일에 이르는 패스트볼을 구사, 스태미너에 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시위했다. 초반 박찬호는 이치로를 비롯한 시애틀 중심타자들을 상대로 할 때, 기합을 넣어가며 혼신의 투구를 거듭해 경기 종반 체력 저하의 우려도 있었지만, 그 또한 기우였다.

투심보단, '포심(Four Seam) 위주' 피칭이 주효

세이프코 필드는 메이저리그 여느 구장보다도 광활한 외야를 가지고 있다. 왠만한 장타도 펜스 앞에서 외야수의 글러브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의미와 결부된다. 이젠 메이저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박찬호는 이 정도의 경기 외적 환경요인을 적절히 응용할 수 있는 '운영의 묘(妙)'는 갖췄다. 이를 박찬호는 시애틀전 투구 패턴에 적절히 반영했다.

오클랜드전과 애너하임전에서 자주 보여주던 투심 패스트볼보다는 포심 패스트볼 위주의 피칭전략을 적용했다. 이는 플라이볼 아웃 빈도가 그라운드볼 빈도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1회 말 세개의 아웃카운트를 이치로(중비)-마르티네스(우비)-이바네스(좌비)로 잡아냈다는 게 바로 그 단적인 증거로 꼽을 수 있다.

감동적인 'K 세리머니'

박찬호의 부활 퍼포먼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이 날 박찬호에게 3타수 3안타를 기록한 브렛 분을 상대로 7회 말 삼진을 솎아내면서 두 주먹 불끈 쥔 'K 세리머니'는 고국팬들이 그렇게 보고싶어하던 바로 그 무엇임에 틀림없었다. 찬호의 부활과 함께 찬호표 'K 세리머니'도 함께 부활했다. 이 장면을 보고 감동받지 않은 팬들은 없지 않을까.

다저스 시절 보여주던 95마일대의 라이징 패스트볼(Rising Fastball)도 되찾았고 텍사스 아우들의 타격 지원도 필요할 때 터졌다. 작년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 환자라는 비난의 집중포화를 퍼붓던 텍사스 지역 언론의 도마에 박찬호가 올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의 자신감 넘친 피칭은 공격적이었고 늠름해 보였다.

다만, 이날처럼 초반에 타선 지원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경기를 시즌 내내 기대하기는 어렵다. 박찬호는 타선이 침묵할 때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만 부활 퍼포먼스는 진정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2004시즌 박찬호 주연의 부활 퍼포먼스는 이제 겨우 1막이 올랐다.

시즌 두번째 퀄리티 스타트와 첫 승에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무엇보다 부활을 위한 힘든 극복 과정과 그 과정을 이겨낸 박찬호의 휴먼 스토리에 더 더욱 찬사를 보내고 싶다. 희망을 보여준 박찬호가 있음에 오후 햇살이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4월 봄날 주말의 어느 오후다.

이일동 동아닷컴 스포츠리포터 sp5dnlw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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