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지능인의 꿈, 밀어드려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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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전국 첫 평생교육 ‘밈센터’

경계선 지능인 청년 4명이 모임에서 그린 그림. 왼쪽부터 ‘밤하늘의 호수’ ‘디저트’ ‘어두운 가든(정원)의 태양’ ‘미래도시’.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경계선 지능인 청년 4명이 모임에서 그린 그림. 왼쪽부터 ‘밤하늘의 호수’ ‘디저트’ ‘어두운 가든(정원)의 태양’ ‘미래도시’.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태양이 비쳐도 여전히 어두운 숲을 그리고 싶었어요.”

‘경계선 지능인’으로 불리는 장진우(가명·25) 씨는 17일 동아일보 기자에게 자신이 그린 수채화를 들어 보이며 이같이 말했다. 캔버스 오른쪽 위에 그려진 붉은 해와 하단의 짙은 녹색 숲의 대비가 선명했다. 장 씨는 이 그림의 제목을 ‘어두운 가든(정원)의 태양’으로 지었다. 일상생활에선 다소 어려움을 겪는 장 씨지만 작품의 깊이는 여느 화가 못지않았다.
● 학습·취업 어려움 겪는 경계선 지능인
경계선 지능인은 지능지수(IQ) 71∼84의 이들을 말한다. IQ 70 이하인 지적장애인과 달리 법적 지원을 받지 못하지만, 일상생활에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갤러리에서 경계선 지능인 4명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서울시 ‘경계선 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은 각자 그린 그림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 모임을 꾸준히 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갤러리에서 경계선 지능인 4명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서울시 ‘경계선 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은 각자 그린 그림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 모임을 꾸준히 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장 씨는 서울시 ‘경계선 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에서 만난 경계선 지능인들과 그림 모임을 함께하고 있다. 센터의 별칭은 밈센터로 ‘꿈을 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선 각자 그린 그림을 소개하고 이름을 붙이는 작은 발표회도 열린다. 장 씨의 어머니이자 화랑 관장인 심재희(가명·53) 씨는 “예술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정서적 안정을 얻는 것 같다”고 했다.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3.6%가 경계선 지능인으로 추정된다. 서울시 인구에 적용하면 약 132만 명이 해당한다. 이에 시는 2020년 10월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서울시 경계선 지능인 평생교육 지원 조례’를 만들고 지원 체계를 마련했다.

지난해 6월 밈센터를 연 것도 지원의 일환이다. 이곳에선 컴퓨터 기초 학습부터 경제금융 교육, 휴대전화 활용 등 사회 적응력을 높이는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3449명(중복 수강 포함)이 교육을 수강했다. 이 센터의 탁현정 연구기획팀장은 “장애인은 법적인 지원을 받지만 경계선 지능인은 일반인과 같은 선상에서 경쟁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다”며 “이들에 대한 세밀한 지원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느린 수업 덕분에 꿈 포기 안 해”
장 씨도 초등학생 때부터 성적이 낮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힘들어했다. 목소리 연기를 좋아해 대학 성우과에 합격했지만 교양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 휴학했다. 하지만 밈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며 같은 어려움을 겪는 친구를 만났고, 교육 종료 후에도 자조모임 등을 통해 고민을 나누고 미술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바리스타를 꿈꾸는 권해진(가명·23) 씨는 “바리스타 학원의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까 걱정돼 학원 등록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밈센터가 경계선 지능인만을 위한 ‘느린 수업’을 열어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권 씨는 “천천히 몇 번이고 반복해 가르쳐 주니 이해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자격증도 따려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달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평생교육 지원 종합계획’을 발표하며 이들에 대한 지원 확대 방침을 밝혔다. 먼저 학교와 사회복지관 등을 통해 선별 검사를 실시해 경계선 지능인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로 했다. 또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경계선 지능인과 부모에게 개인 상담을 지원하고, 맞춤형 교재와 프로그램 등도 개발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지자체 조례에 근거해 이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관련 법이 없다 보니 예산 배분 등에 한계가 있다”며 “국가 차원의 통합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경계선 지능인#밈센터#느린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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