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촌오거리 살인’ 진범 18년만의 단죄… 늦었지만 정의가 이겼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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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징역 15년’ 원심 확정

2000년 8월 10일 오전 2시 전북 익산시 영등동 약촌오거리. 택시운전사 유모 씨(당시 42세)가 흉기에 12곳을 찔려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유 씨가 남긴 것은 동료에게 “약촌오거리, 강도야”라고 무전을 친 다급한 목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사건 당시 목격자가 있었다. 16세 다방커피 배달원이었던 최모 씨(34)가 마침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던 것. 최 씨는 경찰에서 “당시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키 170cm 정도의 남자 2명이 뒤를 쳐다보며 뛰어갔다”며 범인의 몽타주 작업을 돕기도 했다.

그런데 경찰은 최초 목격자라는 이유로 사흘 뒤 최 씨를 임의동행해 여관으로 끌고 갔다. 최 씨를 감금한 뒤 전화번호부 책을 던져주고는 “범인을 찾아”라며 머리와 몸을 때렸다. 익산경찰서 숙직실에서도 경찰은 자백을 강요하며 단체로 구타하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고문을 일삼았다.

수사를 마친 경찰은 최 씨가 도로에서 말다툼 끝에 유 씨를 살해했다는 자백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경찰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나온 허위 자백이었다. 수사팀은 살인범을 검거한 공로로 표창장까지 받았다.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된 최 씨는 징역 10년이 확정돼 복역했다.

○ 사건 발생 2년 10개월 만에 나타난 진범

일단락되는 듯했던 사건은 2003년 3월, 최 씨의 누명을 벗겨줄 첩보가 전북 군산경찰서에 입수되면서 반전을 맞는다. 택시 강도 미제사건을 수사하던 경찰들이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

경찰은 그해 6월 진범 김모 씨(37)의 죽마고우인 임모 씨를 체포했다. 임 씨는 사건 당일 김 씨가 자신의 집에 찾아왔다고 경찰에 말했다. 그는 “(김 씨가) 원래 차분하고 쉽게 놀라는 성격이 아닌데 겁을 많이 먹어 얼굴이 질려 있고 땀도 많이 흘리고 있었다”며 “칼 앞날이 휘어 있었고 피보다 지방분이 많이 묻어 있었다”는 상세한 증언도 했다. 함께 체포된 김 씨도 “내가 진범”이라고 털어놨다. 두 사람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한 얘기를 옆 테이블 손님이 듣고는 암암리에 소문이 퍼져 경찰의 첩보망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 도와주질 않았다. 검찰은 “물증인 흉기를 확보하지 못했다”며 김 씨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했다. 풀려난 김 씨는 임 씨와 함께 정신병원에 입원해 “지금까지 했던 진술은 이혼한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며 진술을 바꿨다. 그러다 임 씨는 죄책감 탓인지 2012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억울함 풀어 달라” 재심 청구

청춘을 교도소에서 보낸 최 씨는 2010년 만기 출소했다. 2013년 박준영 변호사(44·사법연수원 35기)는 이 사연을 듣고 “수사에 허점이 많으니 재심을 청구해 보자”며 최 씨를 설득했다. 최 씨는 “강압수사에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다”며 광주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박 변호사는 김 씨의 2003년 진술을 무죄 입증의 새로운 증거로 제시했다. 2015년 6월 광주고법은 재심을 받아들였고, 이듬해 11월에는 “최 씨가 강압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것이 인정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00년 당시 경찰 수사팀의 막내였던 박모 경위가 최 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후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2016년 9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박 경위는 경찰 중 유일하게 일부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음을 법정에서 시인했다. 최 씨는 검찰이 상고하지 않아 2016년 11월 무죄가 확정됐고, 국가에서 받은 형사보상금 8억4000여만 원 중 10%를 사법 피해자 조력 단체 등에 기부했다.

최 씨에게 무죄가 선고된 날 검찰은 김 씨를 체포했다. 1, 2심 법원은 “김 씨의 기존 자백과 증인들의 진술이 일관되게 일치하므로 피고인이 범행을 위해 흉기를 미리 준비하고 피해자를 살해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지난해 2월에는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재심’이 개봉돼 관심을 끌었다.

대법원은 27일 “객관적 물증이 없다고 해도 조사자 증언과 친구의 진술, 그 밖의 증거 등을 종합할 때 유죄를 인정한 판단을 수긍할 수 있다”며 징역 15년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8년 만에 진범을 가려 죗값을 치르게 한 순간이었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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